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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2_독후감

[2022-23]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by 반란을_꿈꾸며 2022. 4. 5.

 :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게릿 라이언

 : 다산초당

 : 2022/03/26 - 2022/04/04

 

예전에 읽었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생각하고 읽으면 안된다.

이 책의 컨셉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일상생활에 대한 역사책이다.

왕이나 영웅의 이야기가 주류인 그리스로마사에서 간만에 민중 또는 서민의 이야기로 채워진 책이 나왔다.

왕이나 귀족의 이야기는 기록도 많이 있지만 서민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중간중간 추정과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부분은 당시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추정은 아닌것 같다.

검투사들이 보리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이라든가, 그리스 사람들의 동성애의 모습에서 성적 주도권은 남,여가 아니라 자유민 또는 성인같은 계급에 따라 결정되다는 것, 마차가 생각보다 불편했다는 것 등은 새롭게 안 사실이다.

역사라는 게 어릴 때는 영웅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사람사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간다. 물론 그렇다고 영웅의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웅의 이야기 때문에 실제로 죽고 고통받았던 민중들에게도 이제는 눈길이 많이 간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한국사도 이런 백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책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p33 황제들은 특히 사자를 좋아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자기가 싫어하는 원로원 의원을 사자 중 가장 사나운 놈과 강제로 싸우게 했던 적도 있다.

p40 로마의 원형경기장의 야만성과 고내 노예 제도의 비정한 비인간성처럼 영아 유기도 고대인들과 현대인을 구분하는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로마인들에게 인생은 투쟁이었으며 가족을 가지는 것은 힘든 선택을 요구했다.

p49 많은 그리스, 로마인은 자기 의사가 마침내 자기 의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닫고 장의사가 되었다고 농담한 시인에게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p54 로마인들은 그리스를 정복했을 때 그리스인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로마의 상류층은 그리스의 요리사와 조리법을 들여오기 시작했고 요리사와 조리법 양쪽에 경쟁과 과시라는 로마인의 정신을 주입했다.

p63 포도주를 마시는 교양 있는 방법은 물에 섞는 것이었다.

p64 건강한 사람들에게 폭음은 사교적 의미가 컸다. 특정 종교행사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만취가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장되기도 했다.

p103 디오클레티아누스 최고 가격령에 따르면 제빵사는 농장 노동자보다 2배 더 많은 돈을 벌었고 벽화 화가는 3배, 작업 화가는 6배 더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p125 로마에서의 삶을 죽음으로 향하는 전주곡으로 만들었던 주역은 화재나 도둑이 아니라, 하수구에서 부화한 모기와 보이지 않는 병원균이었다

p130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는 자들(다른 말로 야만인)은 본성적인 노예라고 주장했다.

p138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에 대한 연애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p139 로마 속주 이집트에서 나온 파피루스 문서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성격 차이가 중산층의 흔한 이혼 사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p144 고대 세계에서 남성의 성 정체성은 욕구 대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았고 성관계에서 맡은 역할에 의해 규정되었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남성은 섹스할 때 항상 주도적이며 삽입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다. 상대가 여성인지 소년인지는 비교적 덜 중요했다. 여성과 소년 모두 사회적으로 열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p158 그리스 로마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점잖게 성기를 단속한 신사들의 대척점에는 야만인과 괴물의 늘어진 큰 성기가 있었다.

p168 철학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로마제국 시대의 학식있는 그리스,로마인들은 신들에 대한 순수한 신앙과 신화의 부도덕성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p223 부유하든 빈곤하든 모든 대형 도시의 신자들은 주교의 감독하에 있었고, 주교에 의한 관리는 규모에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들에 일종의 결속감을 주었다. 이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에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p252 단거리 달리기가 언제나 운동의 레퍼토리에 포함된 것과 반대로 장거리 달리기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리스, 로마의 남성들은 걷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고, (부유층의 경우) 운동을 위해 승마를 했다.

p260 마차는 이렇게 호화스럽더라도 충격 흡수 작용이 부족했으므로, 이 굴러다니는 궁전에 타면 덜커덩덜커덩 흔드릴 수밖에 없었다. 긴 방석이 깔리고 커튼이 있는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훨씬 더 편안했다. 길 위에서 낮잠을 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도 있었다

p279 동물들을 포획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어려운 것은 포획한 동물들을 로마로 데리고 와서 시합이 있을 때까지 살려두는 것이었다.

p284 콜로세움에서 막바지 시합이 개최될 즈음 터키의 표범, 이란의 호랑이, 이집트의 하마, 북아프리카코끼리는 전부 사냥되었거나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로마 제국주의에 희생된 것은 비단 인간만이 아니었다

p287 왜 검투사들만 보리와 콩을 먹었을까? 에페수스에서 발굴된 검투사의 뼈를 분석한 과학자들은 그 식단이 체중을 늘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 몇 cm에 달하는 피하 지방은 검투사들의 신체 장기를 보호했다. 즉, 검투사들은 전투 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얕은 자상 정도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p334 정해진 정확한 위치에 솥과 변소를 설치했고 깔끔하게 열을 지어 가죽 막사를 쳤다. 위압적인 질서 정연함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p337 게르만인들은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리아인(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사람)과 다르고, 정착민이라는 점에서 동유럽의 유목 민족과 다르고, 특징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졌다는 점에서 동유럽의 유목 민족과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

p339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게르마니아에서 20여년 동안 끈기 있게 지속된 속주 건설을 파괴했다. 살아남은 로마군은 라인강으로 후퇴했다.

p346 순례자들과 교황의 권위만이 로마가 무명 도시로 추락하는 것을 막았다. 9세기 즈음, 로마 인구는 95% 감소하여 3-4만 명이 100만 명을 위해 건축된 도시의 폐허 속에 흩어져 살았다.

p367 비잔티움의 제국의 침략자, 십자군, 오스만 제국은 순서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 묘지들을 약탈하고 훼손하였으며 파괴했다.

p174 라틴어는 근대 초기까지도 진지한 학술 연구에 적합한 유일한 도구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확고하고도 완전한 화석 언어가 되었고 학구적인 담론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며 학생들의 악몽이 되었다.

p379 후손을 남겼다는 전제하에, 천 년 전에 살았던 유럽인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럽인의 조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유전적 표본이 말해주고 있다.

p388 가장 원초적인 수준으로 답하자면 그들은 돈과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이들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하는, 작지만 돈이 되는 제국을 건설했어요

 

p391 여러 모험 중에서도 그의 우상이었던 아킬레우스의 무덤 주위를 벌거벗고 뛰어다녔고, 술에 취한 채 페르시아의 수도를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으면, 인도에서 화살을 폐에 정통으로 맞은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정이 모두 끝났을 때 31세의 알렉산드로스는 불가리아에서 파키스탄까지 펼쳐진 제국의 주인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