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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4_독후감

[2024-08] 국토박물관 순례1

by 반란을_꿈꾸며 2024. 2. 28.

 : 국토박물관 순례1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2/23 -2024/02/25

 

글잘쓰고 말잘하는 유홍준 교수님의 새로운 시리즈..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고, 국토박물관 순례를 읽으면서 지역박물관의 멋짐과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 

시대순으로 쓰신다고 했는데 시대가 너무 쭉쭉 나간다. 시리즈가 길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 책은 구석기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다..

역사에서 제일 긴 시대이긴 하지만 유적이나 유물이 많지 않아서인지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동상동 패총에 대해서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설명을 들은 건 처음인 것 같다. 

덧띠무늬토기도 설명을 들으며 보니 그동안 못보던 멋과 미를 볼 수 있었다.

고구려시대는 읽기만 해서는 머리에 정리가 잘 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도가 머리속에 없어서인것 같다. 

하루 빨리 북한과 만주를 마음껏 답사할 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2권을 빨리 읽어야겠다.. 

 

p18 5월 14일 첫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단은 먼저 인근의 벽돌공장 주변부터 조사했다. 본래 구석기시대를 조사하는 고고학자들에게 벽돌공장은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 채취한 절토 속의 돌맹이들은 불순물 같은 것이어서 이를 잘 골라 버리기 때문이다.

p31 유명한 주먹도끼지만 아무리 보아도 깨진 강자갈 돌맹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그냥 깨진 돌이 아니라 깨트려 만든 돌연장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행위에 목적이 들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p40 고인류학에서 유전자 분석 방식이 도입되면서 인류는 단일 계보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여러 비슷한 종들이 혼재해 살아오면서 생서, 소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최소한 25종의 호모가 등장했다고 생각하고, 비슷한 유형을 끼리끼리 묶은 계통수로 인류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

p51 술을 좋아해 실수도 많았는데, 예를 들어 전곡리 발굴 현장이 대통령 특별 후원금을 받은 날 기분이 한껏 좋아진 선생은 한탄강 매운탕 집에서 실컷 술을 마시고 차를 몰아 서울로 가서 또 2차로 술을 마시고는 마침내 남의 차를 들이받아 음주운전으로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것을 자기 글에 솔직히 고백해놓기도 했다.

p86 이 덧띠무늬토기는 높이 12.4센티미터, 지름 16.4센티미터의 아담한 크기로 구연부에 덧띠무늬가 W자형으로 둘러져 있는데, 형태도 아름답고 상태도 완벽하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가 빗살무늬토기로 일반화되기 전에 덧띠무늬토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p93 패총은 이처럼 천 년, 2천 년을 두고 쌓이고 쌓여 다 삭아서 산성화되어 대부분 가루나 흰 더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개더미가 높은 약 1미터, 길이는 100미터 내외가 되는 것이니 내가 어려서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p101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쓴 아르놀트 하우저는, 구석기인은 오직 자연에 대한 경험에 의지하면서 단순한 동물적 본능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과 인내를 그렸지만 신석기인은 사물을 의식으로 파악하고 표시하려는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부호화, 개념화, 상징화하려는 경향이 생겨 추상무늬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했다

p110 대포산 산마루에 위치한 복천동 고분군에는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가야와 신라 고분 약 170기가 모여 있다. 이곳에서는 금동관과 철제 갑옷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가야토기, 신라토기가 2,500점, 철기 금속류가 3,200점, 유리구슬 등 장신구가 4,010점, 거기에 인골 5구, 말 이빨 7개가 발굴되었는데, 그 양도 양이지만 유물들의 질이 아주 높고 아름답다.

p150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주자학을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면서 주희가 무이산 아홉 굽이에 무이구곡을 경영한 것을 벤치마킹하여 제각기 풍광 수려한 계곡에 자신의 독자적인 구곡을 경영하며 학문적 수련과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다.

p165 반구대암각화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반구대암각화의 내용은 모두 어로와 수렵에 관한 그림일 뿐이고 농경에 관한 그림이나 청동기시대의 추상무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설득력 있다.

p211 남측은 맘대로 여행한다는데 뭐 하느라고 압록강에 처음 왔단말입니가? 농을 섞어 대거리하는 것이 여지없는 평양 말씨인데 그 억양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p223 답사의 기초 지식은 지리다. 그중에서도 그곳 땅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자연지리가 기본이다. 자연지리를 알아야 그 땅에서 살던 민족과 나라가 남긴 역사지리가 이해되고 역사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비로소 고구려라는 나라의 역사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올바로 그릴 수 있다.

p231 하나는 환인에 사는 오녀산성이고,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적석총입니다. 집안 통구에 가서 수천 기의 고구려 적석총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장대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p239 고구려인들은 항상 도성을 두 곳 건설했습니다. 하나는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또 하나는 전쟁시 방어용 진지로 마련한 산성입니다. 둘이 한 세트인 셈이지요. 환인에 있는 평지성이 졸본성입니다. 이는 집안으로 천도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평지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p255 집안의 압록강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강폭이 단동의 압록강과 달리 아주 좁아 강 건너 만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p285 고구려의 건국이 부여에 뿌리를 두었으나 고구려는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부여는 이내 쇠퇴하면서 후대에 생긴 착시현상으로, 고구려 주몽 설화는 부여 동명왕 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350년 무렵부터 668년 멸망까지 300년간 조성되면서 초기 100년간은 여러 칸 무덤의 초상화, 중기 100년간은 2칸 무덤의 풍속화, 후기 100년은 1칸 무덤의 사신도 벽화로 이동하는 양식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무덤의 주체가 초기는 피장자 개인, 중기는 내세의 삶이 영위되는 공적인 공간, 후기는 영혼의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 등으로 변해간 것을 말해준다. 즉, 고구려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점점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