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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4_독후감

[2024-25]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

by 반란을_꿈꾸며 2024. 6. 3.

 :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11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4/21 -2024/05/27

 

11권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12권을 먼저 읽고 11권을 후에 읽었다

어떤 책을 먼저 읽는다 한들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11권은 서울 한복판 이야기다.. 

11권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어릴 때 아빠따라 다니던 골목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겨우면서 그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한국사 검정시험을 볼 때 현대사 문제를 보면 '내가 이때 뭐하고 있었지?' 이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나는 이때 뭐했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나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는데 내가 어릴 때도 우리나라는 정말 다이나믹하게 변화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나도 이제 한국의 현대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후손들에게 어떤 선조로 기록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겹기도, 두렵기도 하다.. 

 

p18 북악산 금단의 구역 경계선상에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들어온 건축은 서쪽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칠궁이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분의 사당이 모여 있는 곳인데 그 출발은 육상궁에서 시작되었다. 윳은 잉태하다, 상은 상서롭다는 뜻으로 육상이란 상서로움(영조대왕)을 낳았다는 의미가 된다.

p23 육상궁과 연호궁, 선희궁과 경우궁은 하나의 사당에 합사되었기 대문에 사당 건물은 다섯 채만 있다. 이렇게 복잡하기 대문에 칠궁답사는 정신 차리지 않고는 뭐가 뭔지 모르기 십상이다.

p37 이 영빈관 건물은 박정희 시대 우리 관공서 건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면정관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골조가 콘크리트든 석조든 전통 지붕을 얹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어색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건축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이 권위주의 시절의 자취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p43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선 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 부적합하고 풍수를 보아도 관저는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의 풍수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풍수는 청와대 터가 아니라 관저 건물에 국한해 말한 것이었다. 청와대 자리야 예부터 천하제일복지라고 칭송되는 길지인데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있겠는가

p60 나는 고향이란 장소에 사람이 더해질 때 비로소 고향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 서촌이기에 이번 답사기는 내 어린 시절을 보낸 회상의 여로를 겸할 수밖에 없을것 같다.

p65 청와대 분수대 옆 바닥에는 4.19 혁명을 기념하느 ㄴ동판 하나가 누워있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에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가 해무청을 돌아 경무대 쪽을 향하자 경찰이 총을 발포해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추념해 2018년에 서울시가 첫 발포 현장을 표시한 것이다.

p80 나는 한국미술사 신령님만 믿을 뿐 종교를 따로 갖지 있지 않지만 1960년대 말에 이 교회에 부임해오신 마경일 목사의 아들 상렬이가 친구여서 몇 번 들어가보았는데 우리 동네에 이렇게 고풍스럽고 예쁜 교회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환상적으로 보였다. 마경일 목사는 온화한 분으로 이화여고 교목실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장을 지내셨는데 글도 많이 발표하셨다.

p96 조선 산후화를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 완성한 겸재는 사실 천분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올락했어도 양반출신이었기 대문에 도화서 화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들이 있었다.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과 삼연 감층흡 밑에는 겸재를 비롯해 사천 이병연, 담헌 이하곤, 이의현, 신정하 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p105 오거리의 길들은 하나같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적당한 비탈이다. 그래서 길 끝이 곧바로 뚫려 있지 않고 길을 걸어가면서 장면들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직선이었다면 길은 사뭇 사무적이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오거리 길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도시계획 때문이 아니라 수성동, 옥류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p107 한국사신론이 20세기 후반 지성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대 우리 연대장이 장교들에게 세미나를 시켜 한국사신론을 차트로 만들어 작전 지시봉으로 짚어가며 발표하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을 정도였다. 나만 해도 이 책처럼 학문적 기조를 유지하면서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는 통사로 한국미술사를 쓰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왔다.

p133 원조 자체는 무상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원조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있어 원조 물자 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산 무기와 제품을 사는 데 쓰였다. 게다가 1958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요 원인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곡물 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밀과 원면이 대량으로 들어온 후 농촌에서는 목화밭과 밀밭이 사라졌다.

p143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p155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명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 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 대종교, 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진단학회, 조선어학회,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58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실학사상에 젖어 있어 16세 때 벌써 태양, 지구,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18세 때 효명세자의 벗이 되어 1827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에는 세자의 명으로 연암집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박규수는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18년간 은거에 들어갔다.

p175 이 가회동성당은 건축 자체로도 유명하고 북촌 답사에서 큰 볼거리인데 2017년에 가수 비와 배우 김태희가 여기에서 혼례식을 올려 더욱 큰 유명세를 타고 있다.

p181 조선귀족은 1910년에 강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가 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내린 조선귀족령에 의거해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와 한일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봉작하고자 만들어낸 특수 계급이다.

p187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볼 때 왕족과 귀족이 누린 고급문화 자체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거의 독점적인 세련된 문화 형식을 나 같은 서민도 누릴 수 있게 확산되는 것이 사회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p197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인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 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p219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 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 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p228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 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용.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p231 통문관은 해방을 맞은 기념으로 1946년에 류열 박사의 농가월령가를 펴낸 바 있었는데 산기 선생은 류열 박사가 왔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는 일행이 방문한다는 롯데월드 민속관 앞에서 기다렸다가 류열 박사를 보고는 냅다 달려가 농가월령가 2부와 50만원이 든 흰 봉투를 불쑥 건넸다.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 원고료도 못 드렸수. 받아주슈”

p232 통문관에는 적서승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p241 이러한 민예품 가게들이 건재하고 여기를 드나드는 점잖고 멋을 아는 미술 애호가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기에 아직까지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서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270 영국사람이 가야토기를 사가면 영국 토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p282 내가 연구원들과 식당으로 들어서자 부인은 반가워하며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면서 “왜 그간 안 왔느냐”며 손을 놓지 못했다. 생태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드디어 밥이 나왔다. 연구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밥뚜껑을 여니 과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윤기 있는 흰밥 위에 콩이 다섯 알 얹혀 있었다. 그런데 내 밥뚜껑을 여니 콩이 열 알이나 수북이 들어 있었다. 옛정이 한없이 느껴지는 콩 열 알이었다.

p286 두 사람은 수락산 기슭에 사글셋방을 하나 얻고 사는데 출판사를 경영하던 시인 강태열이 막걸리 값이나 하고 돈은 천천히 갚으라며 300만 원을 내준 것으로 찻집 귀천을 열었다. 귀천에는 그의 친구 문인들이 드나들면서 인사동은 본격적으로 문인들의 거리가 되었다. 천상병 시인은 결국 1993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고 귀천이라는 시를 남겼다.

p291 평화만들기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으면 옆에도 뒤에도 아는 사람이라 술병을 들고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고, 또 새 손님이 들어오면 일어나서 인사 나누기 바빴다. 약속 없이 가도 어디엔가 끼어 앉아 함께 술 마실 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시골 노인 마실 나오듯 평화만들이게 오는 인생들이 적지 않았다.

p293 김지하는 내 글씨가 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통음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잘 지하형의 옹훈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p295 카페 소설에는 가수 김민기처럼 홀로 와서 술과 고독을 함께 마시는 인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영화제작자 이준동은 한쪽 기둥 옆자리에서 맥주 대여섯 병에 멸치 땅콩 안주만 놓고 몇 시간씩 말없이 앉았다 가곤 해 사람들은 그를 카페 소설의 실내장식 같다고 말하곤 했다.

p302 인사동길의 주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바뀌게 되자 상권이 바뀌면서 전통으로 먹고 살아온 고서점, 고미술상, 민예품 가게, 표구점, 필방 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액세서리와 관광 기념품 가게가 들어섰고 호떡집, 실타래 엿, 쫀득이 아이스크림 가게가 길가를 차지했다.

p308 내가 지나가면서 눈인사를 보내면 언제나 편안한 미소로 답해주셨는데, 이분이 있기에 인사동에는 인간적 체취가 더욱 짙게 느껴졋고 이런 분이야말로 건강한 서민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씨 아저씨가 10여 년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글을 쓰기 위해 수소문해보았더니 그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p311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 남쪽에 만경대가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려왔다.

p333 케네스 클라크는 문명에서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으니 첫째는 율령체계, 둘째는 종교, 셋째는 영토의 확장이다. 신라가 이 세가지를 확실히 갖춘 것은 법흥왕부터 진흥와에 이르는 시기였다

p347 공군에서는 추락한 비행기의 날개자락 잔편만 찾으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비석 머릿돌도 아주 작은 잔편 하나만 찾으면 완벽하게 복원할 자신이 있다. 나는 언젠가는 찾아낼 것으로 지금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