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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4_독후감

[2024-39] 노마드

by 반란을_꿈꾸며 2024. 8. 26.

 : 노마드

 : 앤서니 새틴

 : 까치

읽은기간 : 2024/08/10 -2024/08/20

 

읽고 싶었던 책인데 대출이 길어서 한참 기다려서 빌려 읽었다.

유목민에 대한 역사는 기록이 없다보니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유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고 들었다. 

그런 유목민에 대한 책이라서 더욱 호기심이 들었다.

책에 대한 느낌은 정주민들의 기록된 역사를 유목민의 시각에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것.

고대사에 나오는 스키타이를 비롯하여 이슬람, 몽골인, 튀르키에인들로 이어지는 역사는 흥미진진하고 책에 깊이 빠지게 한다. 이렇게 유목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책을 본 적이 없다보니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런 책은 지도와 메모장을 놓고 그려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출퇴근하면서 읽다보니 잊어버리거나 빼먹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여러번 읽으면서 빠뜨린 부분을 채워나가야 할 것 같다. 

올해는 지식적으로 풍성해지는 책을 많이 읽어서 좋다. 역사책읽는 해로서는 성공이다. 

 

p15 오늘날 이 단어는 정착민들 사이에서 사뭇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낭만적이고 근사한 향수에 젖게 하는 말이다. 반면 한편에서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떠돌이, 철새, 방랑자, 일만 하는 사람, 도피 중인 사람, 주거 부정인 사람들이라고 암묵적으로 판단하는 의미로 빈번히 통용되기도 한다. 즉, 노마드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p35 오늘날 괴베클리 테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고고학 유적지이지만, 금빛 찬란한 보물이 나오지는 않은 관계로 누구나 다 아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슈미트와 그의 팀원들이 찾아낸 것은 휘황찬란한 보물들보다도 값어치가 더 있다.

p37 이 모든 것은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사람들이 최소한 첫 단계에서는 맥주를 양조하고 식용 고기를 준비할 정도로는 충분히 길게 체류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배회하는 수렵인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구운 고기와 아마도 맥주 같은 음료를 곁들여 큰 잔치를 벌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에 살지는 않았습니다”

p48 그 논문의 책임 연구자들은 가운데 한 사람인 인류학자 댄 아이젠버그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다양한 성격들 중에는 상황에 따라 진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하는 것들이 있다” 7R 변이 유전자도 어떤 정황에서는 유목민에게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쪽으로 이롭게 작용하지만, 다른 정황에서는 영양이 부족하고 불행해지는 쪽으로 유도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p58 필리핀의 마닐라 같은 현대의 인구 밀집 도시에서는 동일한 면적에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렇게 인구 밀도가 높은데도 굶주리거나 이웃과 식량 쟁탈적은 벌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여분의 식량을 생산해 필요할 때까지 그것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p71 길마메시 서사시는 2개의 본보기상을 제시한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자연계에 속해 동물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엔카두와, 도시국가에 정착해 사는 길가메시가 그것이다. 다수의 건국 신화가 그렇듯 이 서사시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수정도 가했다. 대다수가 정착민이었을 오래 전 사람들은 야생인간을 길들이는 내용에 기뻐했을 것이다.

p79 오래지 않아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박식가인 토머스 영이 그 질문에 첫 단계 답을 제시했다.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인간”으로 묘사되었던 그가 이번에는 “인도어, 서아시아어, 거의 모든 유럽어들” 또한 사멸된 언어군에 속해 있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1813년에 쓴 글에서 영은 그 모든 언어들이 “절대 우연일 리 없는 다수의 유사성들로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 언어들의 모어에 “인도유럽어족”이라는 명칭을 붙인 사람도 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30억 넘는 사람들은 스텝 지대에서 생긴 인도유럽어의 다양한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p82 흑해에서 48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4,000년 혹은 5,000년 전에 조성된 매장지(현재는 러시아의 아디게아 공화국에 속해 있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무덤에 묻힌 물건들의 원산지이다. 금와 긍ㄴ은 근동산이고, 청금석 구슬은 중앙아시아인, 터키석과 홍혹수는 캅카스 산맥 남쪽이나 이란에서 채광된 것이었다. 이 아름다운 물건들이 시사하는 것은 아마도 기원전 3500년경에는 스텝 지대의 유목민과 목축 공동체들이 인도 및 아프가니스탄산 상품들을 거래했으리라는 점이다.

p96 이집트는 100년에 걸친 힉소스의 지배 이후 기나긴 고대 이집트 역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다. 유목민이 제기한 어려움을 극복한 뒤 생긴 활력에, 외국인의 소개로 개량된 무기로 차오른 용기, 히타이트와 아모리족을 비롯해 여타 인접한 왕국들과의 상호 작용으로 조성된 약동하는 분위기 속에서 파라오 아흐모세 1세와 그의 이집트 신왕국 계승자들은 북쪽으로는 지금의 시리아, 남쪽으로는 누비아와 수단으로까지 국경이 확장된 제국을 건설했다

p103 영웅의 삶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보람되기 위해서는 동료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오랜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의 공훈이 모닥불 주변에서 회자되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전투에서의 용맹함과 이야기의 즐거움을 함께 찬양하는 것이 유목민 삶의 특징이었다.

p114 페르세폴리스는 제국을 구성하던 여러 다양한 요소들의 물리적 표현, 한 관찰자가 기록했듯이 “석조천만”이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 유목민의 힘을 기리는 기념물이었다. 페르세폴리사는 헬레니즘화를 불러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대한 동방 원정이 시작될 때까지 그렇게 200년 동안이나 서 있었다

p118 주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고 이탈리아에서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이 출현하던 기원전 9세기 무렵, 메디아인과 파르스인들이 이란 고원 너머로 퍼져나가고 있던 때와 같은 시기에, 또다른 스텝 종족이 근동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키타이족은 제국의 중심지를 건설하지도, 폴리스를 형성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보다 가볍게 이동하는 삶을 선호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제국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p126 어느날 유목민이 사냥을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다. 왕은 식탁에 올라갈 고기를 마련해 오지 못한 그들에게 사냥기술이 형편없다고 조롱한다. 다음 날 창피를 당한 스키타이인들이 메디아인 젊은이 하나를 도살해 고기의 육질이 좋은 부분을 왕의 식탁으로 보낸다. 그러고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슨 고기를 먹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말을 타고 리디아로 내뺀다. 피의 복수자, 어린아이 도살자, 숙련된 사냥꾼. 이것이 헤로도토스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유목민의 모습이다.

p129 싸움터가 온통 시체와 찌그러진 갑주가 나뒹구는 피바다로 변한 가운데 전투가 끝나자 여왕 토미리스가 나타났다. 그녀는 사람의 피가 가득 든 가죽 부대를 들고 있었다. 부하들이 사방을 뒤져서 키루스의 시체를 찾아내 그의 머리를 잘라 가지고 왔다. 헤로도토스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한다. “내가 너에게 피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겠다고 했지. 자, 실컷 먹어라” 그러고는 피가 가득 든 가죽 부대에 그의 머리를 푹 담갔다.

p133 다리우스는 유목민들이 왜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에서 마추지지 않으려 하는지 알고 싶었다. 스키타이 지도자는 그에 대해 “우리에게는 도시가 없으므로 그대에게 점령될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농작물이 없으니 황폐화될 걱정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라고 답했다.

p140 사마천은 사람들을 경원시하는 버릇이 있었던 듯한데, 재판정에서 그를 변호해준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마 죄과의 심각성과 더불어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중재를 해줄 만한 가족 연줄도, 뇌물로 쓸 만한 재산도 없었다.

p150 스키타이인과 흉노 엘리트들이 착용했던 황금 버클과 정교한 다른 장식물의 디자인이 같으며, 동일한 동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도 안다. 흉노의 고분들에서 로마유리, 페르시아 옷감, 그리스 은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안다. 이 모든것이 말해주는 것은 한나라 황제가 실크로드를 통해서 파르티아, 페르시아 혹은 지중해 유역으로 상인들을 보낼 생각을 하기 오래 전부터 이주성 세계는 황허와 페르시아 만 사이에서 교역을 하고 있었다느 ㄴ것이다.

p169 키루스는 그 제안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부드러운 땅에서 살면 지배자로 군림하는 기간이 더 짧아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드러운 땅에서는 부드러운 인간이 나오는 법”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작물 수확을 잘하면서 전쟁에도 강한 사람을 배출해 유명해질 수 있는 나라는 없다”

p178 역사서설에는 주제 및 조사가 필요한 분야와, 그런 연구의 진척을 이룰 방법이 함께 제시되어 있다. 또한 경제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재정 체계의 작동에 대한 이븐 할둔의 통찰력 있는 의견이 개진되어 있는 것인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왕조 초에는 조세를 적게 하여 세수를 늘리는 반면, 왕조 말에는 과한 조세로 세수를 감소시킨다”라고 말한 것이다.

p185 아사비야라는 용어는 역사서설에도 500번 이상 등장한다. 많은 아랍어 단어들이 그렇듯이, 아사비야에는 넓적다리를 묶지 않으면 젖을 내주지 않는다는 암낙타, 터번을 묶는 행위, 광신자를 비롯해서 맥락이 어렴풋한 여러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당파심, 연대의식, 단결심 부족적 연대이다

p193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p200 알 만수르는 그의 가문, 그의 수도, 그의 제국이 번창할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성벽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물품의 자유로운 거래를 촉진시켜줄 유동성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p204 왕녀도 시를 썼으며, 하룬의 왕세자인 알 아민의 새색시 루바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전해지기로 루바나는 당대 최고의 절세미인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미모와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남편이 환관들을 더 좋아한 탓에 시의 소재는 부족할 일이 없었다. 알 아민이 왕위 계승권 다툼을 벌이다가 자신의 형인 알 마으문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했을 때, 결혼은 했지만 여전히 처녀의 몸이었던 루바나는 이런 글을 썼다. “오, 장군들과 수비대의 배신으로 죽어 노천에 누워있는 영웅이여, 내가 당신의 죽음에 우는 것은 나의 위안처나 반려를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창, 말, 꿈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초야를 가져보기도 전에 나를 과부로 만든 남편 때문에 웁니다”

p224 몽골군이 자신들에게 맞선 도시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것은 유혈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도시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p227 몽골족의 공식 역사서인 몽골 비사는 기세등등한 칸의 성격의 또다른 측면을 묘사하면서, 호라즘의 샤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소식을 듣고 칭기즈 칸이 “어떻게 나의 황금 고삐를 끊어놓는 짓을 할 수 있지?”라는 물음으로 대응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황금 고삐란 칭기즈 칸과 그에게 충성을 빚진 사람들 간의 유대를 뜻한다. 몽골인들은 이 유대를 신이 재가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여겼고, 그러므로 그것이 끊기면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p247 빌럼 수도사는 이 만안궁을 몽케가 관대함을 공개적으로 표하고 알코올을 과도하게 섭취하면서 추종자들 사이에 아사비야를 강화한 국가 행사, 즉 주연을 벌인 장소로 묘사했다.

p249 고고하자들이 카라코룸에서 발견된 그 시대의 금 장신구와 다른 장신구들이 모양과 기법 면에서 1,000년 전의 스키타이인이 착용한 것과 유사했음을 밝혀낸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들-파리의 금세공인 기욤도 다수의 보석 세공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은 그런 작업을 고대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했다.

p258 홀라구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약 20만 명의 바그다드인들이 도시 밖으로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한 역사가는 살해된 사람 수를 그것의 4배로 기록했다. 칼리프의 환관 1,000명과 하렘 여인들 700명도 몽골군의 칼날에 스러졌다. 처형이 끝난 뒤에는 홀라구의 허ㅏㄱ하에 장병들이 바그다드를 약탈했고 강간과 학살을 자행했다.

p267 이제는 그 원칙(이동의 자유와 무역의 자유)을 지침으로 삼고 칸들이 가진 주체하지 못할 욕망의 영향도 받아, 몽골은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세계가 보았던 것들 중에서는 가장 완벽에 가깝도록 마찰이 적고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양의 교역을 하게 되었다. 몽골에 의한 평화는 교역을 통해 팍스 로마나보다도 더 세계를 촘촘히 연결시켰고, 몽골이 세금 징수원으로 뽑은 원주민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p271 유라시아 일대에서 코발트가 이동한 경로를 추적하는 일은 가능하기도 하고 흥미진진하기도 한 반면, 그 못지않게 광범위하게 이동한 생각, 신앙, 지식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p275 이 화물 선단이 창출한 무역의 수익성이 얼마나 좋았는지, 쿠빌라이의 군사 공격에 저항했던 나라들-인도 왕국들, 베트남, 크메르 제국(캄보디아), 타이의 수코타이 왕국과 치앙마이 같은 곳들-마저 그의 해상 테느워크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쿠빌라이의 종주권을 인정할 채비에 나섰다.

p282 흑사병은 1346년 카파에서 발생해 1350년 소멸되기 시작할 때까지 마치 죽음의 전사처럼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가며 7,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유럽에서만 그 병으로 죽은 사람이 인구의 3분의 1일 2,500만명이었다.

p287 생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보내고 이제 50대 중반이 된 그는 술탄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이 투쟁에서 그의 가장 잔혹한 면모가 드러났으며, 이븐 할둔이 카이로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언급하며 그 도시의 영광과 함께 폭군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라고 쓴 것도 그래서였다.

p295 칭기즈 칸은 자신이 점령한 대도시들을 멀리했다. 하지만 티무르는 좀더 확고한 입장을 취해, 대규모 건축물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꾸미는 일에 전념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된 사마르칸트에서, 그는 “우리의 힘을 의심하게 사람에게는 우리의 건축물을 보여주라”고 공언했다.

p325 1659년 중국이 외국인들에게 시장 문을 닫아걸자 페르시아 블루로 중국식 문양을 그려넣은 이스파한의 도기가 서방에서 중국 자기의 인기 있는 대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p330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은 다른 제국들-가령 나이지리아의 카넴-보르누 제국, 중앙아시아의 중가르 유목 젝국, 심지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인 라코타족에 이르기까지-은 하지 못한 방식으로 서구에서 반향을 일으킨다. 아마도 그곳들이 지닌 전략적 위치와 그 뒤의 식민지 역사 때문일 것이다. 현재는 그 세 제국이 튀르키예, 이란, 인도로 발전해, 뱅골 만에서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그리고 근동에서 서쪽의 북아프리카 일대까지 뻗어나가 있다.

p333 그 직후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죽을 때만 완전히 멈춘다”고 썼다. 파스칼의 이 짤막한 두 분장이야말로 유목민의 방랑하는 삶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유목민이 그의 생시에 그랬듯이 우리 시대에도-계속 움직이든 죽든 간에- 거의 만투라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p367 이방인이 그곳에 상륙하려면 조상신의 노여움을 달래줄 필요가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대신 베이컨이 주목했던 세가지 발명품, 즉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나침반, 그들에게 지식을 준 책, 그리고 총과 화약으로 의기양양해져, 총을 쏘며 해안으로 난입했다. 그것이 다라왈족의 마음과 정신에 일으켰을 혼란을 상상해보라

p373 그는 자신의 시간을 들여 야생에 있는 것을 채취하면서 자신이 먹을 것의 일부를 스스로 재배해본 결과, 생계를 꾸려가는 데에는 일주일에 하루만 일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계산이 맞는다면, 그는 수렵채집인들보다도 시간을 더 능률적으로 했다는 말이 된다.

p387 유목민과 비유목민 부족을 망라해 명백한 운명의 완수로 희생된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뿐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잘 알고 보호해준 세계, 그들이 숭배한 동물들과 신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사라진 것이 미국 대평원을 누비고 다닌 막대한 들소 무리였다.

p390 찰스 다윈도 그의 동료 겸 경쟁자였던 진화론자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의 인류의 기원을 읽으면서 특별히 눈에 띄는 문구 하나에 밑줄을 쳤다. 인간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한 형태인 약육강식이 필요하고, 그것에 의해서 인간 종족은 강해지고 개량된다고 주장한 문구였다.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영국 총리 솔즈베리 경이 “지구상의 나라들은 산 나라와 죽은 나라로 대충 나눌 수 있다”며 그 개념에 공감하는 연설을 했다. 유목민도 죽은 나라 중 하나였다.

p409 유목민은 언제나 교역할 장소, 거래할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교역 장소에 다다를 수 있는 자유로운 이동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방복지를 찾아다닐 자유도 늘 필요했다. 위대한 유목민 제국들이 자유로운 이동, 자유로운 교역, 그리고 때로는 양심의 자유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