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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5_독후감

[2025-17] 어떤 동사의 멸종

by 반란을_꿈꾸며 2025. 5. 20.

제목 : 어떤 동사의 멸종

 : 한승태

 : 시대의 창

읽은기간 : 2025/05/06 -2025/05/11

 

굉장히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우연히 알게됐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저자는 다양한 육체노동의 현장에서 일을 했고, 그 일을 바탕으로 르뽀형식의 글을 썼다. 

노동의 현장은 콜센터, 택배, 부페식당등이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작업현장이다. 

실제 현장의 소리를 듣는듯 해서 몰입이 더 잘되고, 공감도 많이 됐다. 

현장의 소리는 날카롭고, 마음을 아리게 하고, 슬펐다. 

그러나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노동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한 몇몇 문장은 뜬금없긴 하지만 글을 읽는 재미를 침범하지는 않는다. 

가슴아프지만 유쾌한 책을 읽어서 좋다.. 

 

p13 그날 내가 목격한 것은 궁지에 몰린 자영업자가 어수룩한 구직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화 이후로 이어져 온 산업이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했다는 증거였다.

p25 10여년 전부터 전 세계의 미래학자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는 군인들처럼 살생부를 작성해 왔다. 그 목록의 가장 맨 위에 이름을 올린 것이 바로 텔레마케터나 콜센터 간은 전화받는 직업이다.

p37 전화 상담사는 해결사가 아니라 메신저다. 주문과 관련된 최종 처리는 상품이 나가는 매장에서 이루어졌고 우리는 매장에 처리 요청을 보내고 결과를 기다렸다. 실제 문제 해결 능력에 있어서 콜센터 상담사는 인간과 허수아비의 중간 정도에 놓였다.

p49 나는 위로가 필요한 표정으로 선배를 돌아봤다. “그래도 이 아저씨는 점잖네요. 새끼 소리는 안 하잖아요”. 씨발 소리를 들었는데 점잖다니 정말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구나.

p60 남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더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 감독일 때다

p62 그때도 농장에서 도망칠 궁리만 했었다. 내게는 양돈장과 콜센터를 비교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전자가 항문으로 똥을 싸는 동물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라면 후자는 입으로 똥 싸는 동물들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두 종류의 동물들과 모두 일해본 관점에서 말하건대 양돈장이 단연코 수월하다.

p71 한반도 최초의 전화 개설자는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전화 상담사의 조상님이라고 할 전화 교환수의 고객은 말 그대로 왕이었다. 고종은 신하들에게 전화로 어명을 내렸는데 그럴때면 신하는 수화기를 들기전 의복을 갖춰입고 큰 절을 네 번씩 올려야 했다. 슬픈 일이지만 오늘날에도 콜센터의 고객은 왕이다. 군주제의 왕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왕으로 바뀐 것뿐이다.

p81 콜센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상담사의 일과는 여덟 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신에게 달린 악풀들을 소리 내서 읽는 거랑 같다고. 상담사의 가장 평범한 하루일지라도 가족들이 함께 통화를 듣게 된다면 펑펑 울며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하게 될 거다.

p124 내가 일터에서 사랑하는 순간들이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될 때다. 너무나도 뻔하고 단순해 보이는 현상 속에서 다양한 체계와 규칙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조금의 상상력도 자극하지 않는 보잘것 없던 존재들이 고통을 함께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단면들을 보여주는 순간들.

p148 일당이 센 일용직으로 일하면 일정한 수입은 있으면서 마음만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런 맛에 일용직에 계속 남는다.

p174 물류센터에서 내가 가장 놀란 점은 까대기하는 사람 중에 우울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이것이 내가 일터를 전전하는 동안 경험한 최고의 미스터리였다.

p187 주방에서 일할 때 신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과격한 수업을 통해 깨달았다. 잠수부에게 산소통이 필수적인 만큼 주방 직원에겐 편한 신발이 필수품이다. 나중에 보니 오래 일한 직원들은 모두 21세기의 고무신,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p189 주방에서 증기를 물로 보면 응급실에 실려 간다. 주방에서 증기는 축축한 불길이다. 온도, 고통 모든 면에서 그렇다.

p223 요리사처럼 자기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도구가 손에 바로바로 잡히지 않으면 당황하고 짜증부터 난다. 그렇게 위치를 바꿔서 얻는 효과가 무엇이든 간에 길게 보면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가 더 크다.

p233 이런 웍은 일단 바닥이 고르지 않다 보니 일정하게 가열되지 않고 음식이 바닥에 쉽게 눌어붙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웍 안쪽 표면에 말라붙어 아무리 손톱으로 긁어도 떨어지지 않던 검은 따까리가 음식이 끓는 상태에서 떨어져 나갈 때가 있다는 점이다.

p242 나는 손끝에도 이렇게까지 힘을 주면서 일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냄비 닦을 때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을 줘서 닦고 긁어내다보니 그렇다. 까대기가 허리나 무릎 같은 관절 부위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주방은 관절부터 손끝까지 구석구석 안 쓰는 데가 없다. 요리라는 일은 육체라는 산 전체에 빠짐없이 길을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p247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지만, 식당은 작업장으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일종의 공연장이다. 가수들이 콘서트장에서 느끼는 희열을 요리사들은 주방에서 느낀다. (공연이 끝난 후의 공허함도..)

p261 지금도 주방을 떠올리면 그 그릇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키친타올이 올려진, 고추장 비빈 밥 한 덩이가 남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 음식이 넘쳐나는 벽 뒤에서,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겨둔 주방장의 시뻘건 밥 그릇.

p269 휴게실의 아늑함을 깨뜨리는 유일한 단점은 낮은 천정이었다. 이곳을 설계한 사람은 한국인의 신장이 180을 넘는 일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확신에 차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방으로 된 공간은 바닥이 높았는데 거기에 서 있을 때는 허리를 거의 기역 자로 구부려야 했다. 사람들은 휴게실에서 보내는 시간 대부분을 드러누워 지내는 것으로 건축학의 한계를 극복했다.

p277 놀랍게도 억대 연봉을 자랑하는 이 금융 엘리트들의 삶은 얼마 전 중성화 수술을 마친 우리 집 고양이의 고환과 비슷한 상태였다. 즉, 텅 비어있었다.

p284 아무리 익숙한 일일지라도 그걸 직업으로 삼으면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할 때가 있다. 이전까지는 기술이라든가 학습이라는 개념과 단 한번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을 프로스포츠처럼 대해야 한다.

p299 미화팀에 오랜 세원 동안 내려온 금언이 있었으니 사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구역은 너무 더럽지만 않으면 되지만 임원들의 눈에 자주 띄는 곳은 결벽증 환자 수준으로 깨끗해야 한다는 거다.

p331 그는 무슨 일이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난리를 피웠지만 정작 자기 의도를 전달하는 능력은 한참 부족했다. 낙하산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능해야만 하는 건 아닐 텐데…

p380 감춰야 마땅했지만 그 비열함 속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었다. 노동의 무게 아래서 비틀거리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진실이. 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오직 자신의 못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p383 출판계 사정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태평양 건너에서도 고생고생해서 몇 년 만에 첫 책을 낸 작가의 손에는 보잘것 없는 돈만 쥐어질 뿐이다. 그 초라한 금액에 실망한 나머지 열에 아홉은 데뷔작 인세를 받고는 출판계를 영영 떠난다. 그래서 데뷔작 인세를 굿바이머니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