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읽는 직업
작가 : 이은혜
출판사 : 마음산책
읽은날 : 2022/07/03 - 2022/07/10
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예쁘고, 무엇보다 편집자가 쓴 글이라 호기심이 많이 생겨 읽었다.
편집자라는 직업이 얼마나 어렵고 고독한 직업인지에 대해 확 와 닿는다.
서점주인처럼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으면서 일하는 직업일 줄 알았는데, 저자 못지않게 창작의 고통을 겪는 직업이다.
거기에다 독자의 기호와 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위치다 보니 본인의 취향과 좋아하는 내용만으로 책을 구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 참 어려울 것 같다.
1년에 수천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편집자 손에서 커트당한 책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책은 저자가 쓰지만, 그 책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역할은 대부분 편집자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마음졸이고 힘들게 내 놓은 책이 1쇄를 넘기지 못하고 사장된다면 그 마음 또한 얼마나 아플까...
세상에 쉬운 직업은 없지만 이만큼 고약한 직업도 없을 것 같다.
특별히 눈에 띄고 재미있는 부분은 독자와 편집자의 관계다.
편집자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는 독자가 있다니... 놀라웠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오늘도 출퇴근하면서 한권의 책이 손에 들린다. 노력한 사람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내게 기쁨과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다.
p14 저자의 경험이 글이 되면 그것을 읽은 편집잔느 이를 다시 경험으로 구현한다. 이 정도는 사소한 일일테고, 가령 동물 복지에 관한 책을 만든 편집자는 비건에 관심이 높아진다
p24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또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이 편집자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글로 사람을 먼저 접하는 우리는 서로의 신상부터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정체성의 핵심(글)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p27 펠리오는 쉽지 않은 학자다. 그는 연구 뿐 아니라 편지와 서평을 쓸 때도 한결같이 학자의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그의 작업에 접근하려면 역자는 프랑스어, 영어, 한문, 고전문학에 두루 능통해야 한다. 실크로드 하면 둔황, 둔황 하면 혜초, 혜초 하면 펠리오인데도 그의 책이 국내에 한 권도 번역되지 않은 이유다
p35 편집자는 전문적인 학술 세계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축적한 연구를 흡수하려고 끊임없이 기웃거리는 존재다. 글을 읽고, 그에 관해 저자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자기 발전을 이루는 가장 빠르고 핵심적인 방법이다
p43 각주는 글쓴이의 실력을 검증하는 세밀한 장치다. 모름지기 학자는 선대의 문헌을 모두 검토한 뒤 그로부터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
p54 몇 년 전 P는 여러 해에 걸쳐 두꺼운 번역서를 완성했다. 많은 번역가가 그러하듯 텍스트가 까다로워 그도 연구를 병행하느라 작업을 오래 지체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번역을 하면서 밤에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는 사실은 책 출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p79 편집은 배치와 재배치, 수정과 재수정의 과정이며, 편집자는 원본을 창조하는 저자와는 독창성 면에서 수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편집자가 공들여야 하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수백 수천의 시간이며, 결국 지난 세월을 돌아봤을 때 남는 것도 뒤에 버려진, 못 보여준 것 속에 간직된 시간들이다.
p103 그는 편집자가 책의 제목을 바꾸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다. 제목은 글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며, 뒤에 오는 내용을 쓴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불여선 안된다. 필자가 붙인 제목을 자기가 지은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편집자들의 습관은, 판지로 만들어 세운 마오쩌둥의 몸에 관광객이 머리만 갖다 대고 찍은 사진에 빗댈 수 있다.
p122 문제는 이런 직업에 10년을 넘어 20-30년간 몸담으면 편집자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시선이 무뎌져 날카로운 펜이 되기보다 뭉툭한 색연필이 되기 쉽다는데 있다
p126 편집자들은 모험과 실험보다는 안정과 확신에 올라타 애초에 자신이 무엇 때문에 편집자가 됐는지 점점 망각해간다
p128 몇몇 고전을 주로 탐독하며 독서의 지평을 잘 넓히지 않는 깐깐한 독자나, 절판된 양서들에 아쉬움을 느끼는 독자들은 출판계의 생리를 얕볼지 모른다. 편집자는 여기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저들은 우리의 주류 독자가 아니므로 더 넓고 얕은 물에 있는 독자들을 만나겠노라고 생각한다.
p136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허전해 견딜 수가 없어서’라고 답했는데, 이는 작가적 소양을 타고난 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p146 독자가 몰리에르를 읽고 정말로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그 책장을 덮을 권리가 있다. 몰리에르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하품을 연발하게 만들면 그는 더 이상 내게 고귀하거나 흥미를 끌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p156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두꺼운 책들을 벽돌이나 베개라며 놀리지 않고, 저자들이 다가가려 했던 깊고 넓은 세계에 합류하려는 이들이 최소한 2000-3000명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p163 이들 모두 21세기를 어느 정도 예언하며 경고하는 절박한 목소리인데, 딱 1000명의 독자만 빼고는 이들 증언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책을 만들고 나면 딱 천 마리의 학만 접어 선물한 듯한 기분이 든다. 학을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것은 물론이다
p167 법학자 한동일의 법으로 읽는 유럽사는 2016년 가을 저자로부터 복간 의뢰를 받았다. 아주 진지한 학술서였지만, 국내에서는 희귀한 연구라 복간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판매 목표를 1000부로 잡고 복간을 결정했는데, 저자가 갑자기 라틴어 수업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면서 예상을 훨씬 웃돌아 약 8000부까지 판매되었다
p173 테오도르는 혹시 글을 더 썼다가 조롱받으면 어떻게 하나를 가장 걱정했다. 너무나도 형편없는 글을 써서 갈매기조차 키득거리면 어떡하나. 나는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
p175 최근에 동네 집을 하나 고쳐서 돈이 들어왔으니 책 좀 추천해주시오. 그와는 이런 식의 통화가 주를 이룬다. 사서처럼 필독서로 꼽히는 것, 두껍고 본격서 느낌이 나는 책들이 그의 취향이다. 요즘에는 지평을 넓혀 2차 텍스트도 꽤 많이 읽는다. 젊은이들에게는 공기와도 같은 인터넷을 못 해서 직접 불러주면 받아 적어서 배송한다
p179 하루는 니체르 ㄹ읽는 데, 어느 구절에서 자신이 요즘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니체를 따라 나도 늦여름을 읽기 시작했다. 19세기 독일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19세기에 쓰인 책들을 찾아 읽느라 약 1년간 20세기 작품들로 올라오지 못한 채 19세기 말에 걸친 세기말 빈, 좋은 유럽인 니체와 같은 책을 기획, 편집해서 출간했다.
p184 작가들의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찰스 디킨스의 추종자였다. G.K. 체스터턴 역시 20세기 작가 중에서 디킨스를 가장 존경해, 자기 소설 서문에서 항상 디킨스를 언급했고 디킨스에 관해 책 한 권을 통째로 할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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