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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2_독후감

[2022-70]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by 반란을_꿈꾸며 2022. 8. 17.

 :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

 : 김상근

 : 시공사

 : 2022/08/06 - 2022/08/12

 

이탈리아 시리즈를 쓰고 계신 김상근 교수님의 세번째 책..

이번에는 피렌체다.

르네상스의 도시이고, 메디치가로 유명한 곳.

도시는 작지만 볼거리가 풍성하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뷰가 멋있었던 곳.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운데 하나..

김상근 교수님은 내가 알고 있는 이런 피렌체의 모습에 피렌체의 역사를 더해주었다.

메디치가가 권력을 잡기 이전의 피렌체의 역사를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권력투쟁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평민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세력까지...

다른 도시와 달리 왜 이렇게 권력투쟁이 강했을까? 압도적인 세력이 없기 때문일까?

주변의 도시국가의 힘을 빌려야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연약한 도시가 내부적인 권력투쟁은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진행했다는게 아이러니...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다시 억압의 모습을 보이는 걸 봐서 권력의 속성이 억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 피렌체를 방문하게 되면 르네상스 이전의 투쟁의 현장도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 2011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도었다. 책을 쓰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p17 그가 우리에게 들려줄 피렌체 이야기는 피렌체 사람들의 일상이다.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부자들의 밥상 밑에 앉아 있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려고 온갖 꼼수를 부렸던 귀족들의 이야기, 죽어도 귀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절규했던 평민들의 이야기, 질투와 배신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 분노를 다른 사람들에게 쏟아내다가 결국 자신이 망가지는 이야기 등이 적나라하게 펼쳐질 것이다.

p41 베키오 다리 위에서 벌어진 이 암살사건은 장차 피렌체를 두 진영으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강남을 대표하던 교황파 부온델몬티 가문과 강북을 대표하던 황제파 우베르티 가문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p60 곧 보게 되는 것처럼, 이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럭 구실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p74 단테는 자신의 많은 책과 저술에서 아내 젬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9살 때 만난 동갑내기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천사로 묘사했지만, 불쌍한 아내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p96 두 사람의 예상치 못한 죽음에서 피렌체 시민들은 교훈을 얻었다. 도시의 분열,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은 평민들이 속 좁은 판단으로 귀족들의 피렌체 입성을 막고 외국의 왕을 모셨는데, 그것이 그들을 커다란 고통으로 몰고갔다.

p120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대기근이 피렌체를 덮쳤고, 귀족과 하층민의 불만은 함께 높아졌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평민에게 밀려 위엄을 잃었고, 하층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p133 성당 내부에는 천재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단테를 위시해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작곡가 조이카노 로시니 등의 영묘가 안치되어 있다. 이탈리아 영광의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p137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피렌체는 단순히 르네상스의 도시나 천재들의 도시가 아니라 근대적 계몽의 도시이며,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 인류 최초의 도시였다.

p173 지배하려는 자들이 사라진 곳에서 피렌체 사람들은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의 열매가 르네상스다. 이 시기에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꽃의 만개를 목격하게 된다. 미술사가들은 1400년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성 세레자 요한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놓고 경쟁했던 때를 르네상스의 시작 지점으로 잡는다.

p174 그의 눈에 비친 피렌체는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귀족들의 거만함, 금력과 권력의 경계선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던 그란디들의 욕심, 지배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어쨋든 지배받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던 하층민들의 어리석음이 뒤섞이 곳이었다.

p205 도시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은 피렌체 시민들의 심리를 경계심에서 경외감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예술과 공공 건축물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면, 대중들은 일종의 부채 의식과 기대감을 갖게 된다.

p210 코시모의 탁월함은 관후함에서 출발했다. 모름지기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은 관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부자의 인색함보다 졸렬한 것이 없다. 권력을 가진 자의 옹졸함보다 더 볼썽사나운 것은 없다.

p228 200년간 피렌체는 그야말로 격동의 정치 일정을 소화해냈다. 13세기 말 귀족의 통치가 자멸로 끝난 다음, 귀족과 평민, 평민과 평민, 평민과 하층민, 하층민과 하층민 그리고 다시 평민과 그란디가 충돌했던 피렌체는 그야말로 공화국의 실험 부대와도 같았다.

p235 정치적 계산에 능수능란하고 자인한 성품을 가진 아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1423년부터 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아 중북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쟁을 롬바르디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필리포는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기전, 자기 안마당부터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했다.

p249 약 100여년 전 흑사병이 피렌체를 초토화했을 때, 보카치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데카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약 100년 후에 바로 그 성당에서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그 가문에서 교황이 2명 탄생할 것이며, 프랑스 왕비가 2명 탄생할 것이고, 무엇보다 르네상스라는 유럽 역사의 전환점을 메디키 가문이 이끌 것이다.

p266 그러나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반복적으로 칭찬하고 있는 그의 덕목은 신중함과 관대함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p283 신 성구실의 하이라이트는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메디치 영묘실과 그 안에 전시된 조각 작품들이다. 방문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예술이 영혼과 극적으로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작은 영혼의 공간과 조각을 처음 주문한 사람은 교황 레오 10세였다.

p302 피에로의 통찰력 덕분에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배출하고 또 왕족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p323 전설적인 용병 대장이 등장하자 볼테라 시민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싱겁게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몬테펠트로가 이끌고 온 우르비노와 밀라노 연합 용병대들은 성문 앞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12시간이나 계속된 볼테라 침공으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볼테라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p328 수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성당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복제품을 전시해놓았다. 진품은 성당 광장 뒤쪽에 있는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기베르티의 청동문 2개와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렌체 피에타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p352 그를 놓아주기에 앞서 왕은 온갖 종류의 친절과 애정의 표시로 로렌체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으며, 공동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그와 영구적인 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로렌초는 몇 달 전 한 위대한 인물로서 피렌체를 떠났지만,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의 평화를 회복했으므로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p362 그는 옛 애인 루크레치아 도나티에게 사랑의 시를 바치기도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점잖은 표현대로, “베누스의 일에 지나치게 빠져 있던” 바람둥이이기도 했다. 그는 관능적인 삶을 살면서, 동시에 진중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그를 조합이 거의 불가능한 전혀 다른 두 인간이라고 평한다.

p407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잠시 설명한 대로 마키아벨리는 이곳에서 피렌체의 젊은 지성인들과 정치인들을 가르치면서 로마사 논고와 전쟁의 기술과 같은 명저를 남겼다. 루첼라이 정원은 단순한 고전 강독 모임이 아니었다. 피렌체의 현재 모순을 타파하고 미래의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모임으로 발전해갔다.

p416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