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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2_독후감

[2022-72]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by 반란을_꿈꾸며 2022. 8. 25.

 :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 마틴래디

 : 까치글방

 : 2022/08/14 - 2022/08/23

 

오스트리아의 빈을 좋아하기에 합스부르크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기껏해야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마리 앙뚜와네트, 모차르트에 나오는 요제프 황제 정도만 아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의 ATOZ를 배우게 됐다

책은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 

아무래도 에피소드 중심이 아니라 해당 지도자의 역할과 사건을 기술하다 보니 재미보다는 정보전달에 치중한 책이다.

그래도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긴 이야기며,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2세의 계몽주의 정치, 뜬금없이 합스부르크 사람이 왜 멕시코에 가서 황제가 됐는지,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된 후 오토의 멋진 모습등

전쟁이 아닌 결혼으로 제국을 이룬 특이한 제국이기도 했고, 문화를 사랑했던 제국이다보니 강한 제국은 아니지만 멋진 제국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유럽 역사의 다른 조각과 비교하면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역시 아는만큼 읽을 수 있고 보이는 것 같다. 

 

 

p16 구왕궁은 호화로운 시설로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 아니었다. 구왕궁은 빈과 그 주변의 농촌을 위압하고, 권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성이었다.

p24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황제들과 통치자들은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교 교리의 확산을 단속했따.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종교의식에서, 신앙을 정화해야 한다는 사명은 영성체를 향한 과시적인 헌신과 안무를 통해서 연출된 이교도 화형 장면으로 골고루 드러났다

p39 초야권은 후대인들의 외설적인 날조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3실링은 결혼에 부과되는 세금이었을 뿐이고, 사육제의 종료를 알리는 사순절 선물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스위스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p44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혈통을 파고든 연구자가 깨달았듯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상속자를 낳았다. 아들이 없을 때면 사촌과 조카가 대를 이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를 잇다 보니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의 대가 끊어질 대 그 재산을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p66 알브레히트는 궁정을 오늘날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 중심부에 위치한 구왕궁으로 옮겼다. 스위스인들이 아르가우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토지와 거점을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

p76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혈족 집단을 뛰어넘게 되었다.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과거를 상상으로 꾸며대고 대공의 관과 대공이라는 칭호를 창안한 데에 힘입어 후계자들 사이에서 연대감과 목적의식이 생겼고 연대감과 목적의식은 각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더 깊숙히 각인되었다.

p86 계보 중심의 기사 이야기는 귀족과 왕족의 혈통을 당대의 지명이나 언어, 여성 전사들과 거인들, 용이 가득했던 전설상의 과거와 연결하려는 중세 말엽의 문학 장르였다. 그러나 영주 95인의 연대기는 성서의 역사와 황실의 역사,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뒤섞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공상을 문장학이나 전기와 조합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p91프리드리히는 장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는 친척들과 적들보다 오래 살았고, 덕분에 여러 개로 나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재산을 단일 단위로 재편할 수 있었다.

p109 나중에 드러났듯이, 막시밀리안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의 상속자들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남들은 전쟁을 벌일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한다”라는 17세기의 어느 낙서처럼 말이다.

p119 카를은 애인들을 둘 만큼 사별의 아픔에서 충분히 벗어난 후에도 티치아노에게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고, 종종 악사들에게 그녀를 추모하는 의미로 프랑스 샹송 “1000가지 후회”를 연주하도록 지시하는 등 부인의 죽음을 꾸준히 애도했다.

p146 펠리페는 그가 자신의 처신을 두고 몇 차례 내놓은 해명을 근거로 판단하는 편이 더 낫다. “종교에 대한 모욕을 조금이라도 감수하느니 차라리 내 모든 신분을, 그리고 만약 있다면 100개의 목숨을 잃겠다. 이단자들을 통치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p179 헤르메스의 사상은 모든 물질이 사실상 같은 것이기 때문에 만물의 재료인 원질 또한 금으로 바뀔 수 있을 법하다는 원리를 확증함으로써 연금술 관행의 밑바탕이 되었다.

p229 마그데부르크 약탈 사건은 수많은 소책자와 선전용 인쇄물, 설교를 거쳐서 아주 생생하게 알려졌다. 카톨릭교도들은 그 사건을 천벌의 관점에서 평가했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마그데부르크 주민들이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p236 베스트팔렌 조약은 “기독교 세계의 전반적인 평화” 달성을 목표로 삼았고, 따라서 최초의 유럽헌법을 제정한 조약으로, 또 근대 유럽의 발전에서 중대한 순간을 장식한 조약으로 높이 평가되어왔다.

p262 그들의 탁월한 통치 덕분에 펠리페 4세는 아무 부담 없이 의식과 관련한 역할을 맡고, 훌륭한 예술품을 의로하고, 본인의 특기를 발휘하여 무려 30명 이상의 사생아를 둘 수 있었다.

p273 바로크의 핵심은 풍유이고, 풍유는 흔히 상징(인간 조건의 양상이나 태도나 행동이 농축된 그림 문자나 주제)의 형태를 띤다.

p287 자동체스 인형이라는 속임수가 먹힌 데에는 켐펠렌의 기술적 창의력뿐만 아니라 상자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공로도 컸다

p297 마리아 테레지아는 치세의 거의 절반 동안 전쟁을 치렀다. 재정 개혁과 자원의 적절한 관리는 그녀가 군사적으로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이 역할을 했다

p320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민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과정의 기저에는 공동의 복리를 위해서 신이 군주를 임명했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p325 요제프가 반포한 관용 칙령에 힘입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은 아마 유럽에서 종교적 비동조자들에게 가장 관대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p345 죽음, 철학, 상업 등을 주제로 이사벨라가 남긴 글 중에는 남성론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이 있는데, 이 글에서 그녀는 남자들을 실속 없고 이기적인, 그리고 여성의 속성인 이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자들이자 무익한 동물들이라고 통렬히 비방했다.

p350 빈이라는 도시에는 저급한 면도 있었다. 약 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인 이곳엔느 1만 명의 일반 매춘부들과 4,000명의 고급 매춘부들, 1만 2,000명의 매독 환자들이 있었다.

p356 1780년대 후반기에 개혁이 좌초되기 시작하고 반대 세력이 결집하자, 요제프는 언론과 극장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어릿광대의 즉흥 공연을 금지했고, 신문에 특별세를 부과했으며, 모든 종교와 도덕과 사회질서를 훼손하려는 잠재적 말썽꾼들을 조사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p394 롬바르디아에서는 모든 민주 정치가 파괴되었고, 군사 통치와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는 반란자들과 동조자들을 체포해서 공개 태형과 교수형에 처했다. 오늘날 음악회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의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관객들은 곡의 배경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411 프란츠 요제프는 책임을 지지 않았고 제도나 헌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군주로서 적합하지않은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우월한 지혜의 소유자라고 자부했다.

p435 멕시코에서는 이미 사형제가 폐지된 상태였음에도 그는 짧은 재판을 거친 뒤 2명의 장군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1867년 6월 19일에 처형장으로 향할 때, 그는 날씨를 언급했다. “날씨 참 좋군! 늘 이런 날에 죽고 싶었지”

p436 막시밀리안의 위엄과 용기, 순교를 길게 설명하는 익명의 프랑스어 원문은 곧바로 독일어와 헝가리어로 번역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막시밀리안이 사후에 그와 같은 명성을 누린 것은 무엇보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 때문이었다.

p462 조각상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자연의 제국을 탐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제국 창건자들만큼 칭송되어야 했다.

p463 역사주의는 19세기 중엽의 건축적 관례였다. 역사주의에 의하면 건물은 각자의 기능에 맞추어 그것과 가장 부합하는 시기의 건축 양식을 반영해야 했다. 따라서 빈의 시청은 빈이라는 도시가 영광을 누렸던 중세를 상기시키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p483 루돌프 황태자는 1888년에 보스니아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이룩해야 할 사명은 동방에 서양 문화를 도입하는 것이다 .”

p505 영국의 외무 장관 로이드조지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는 “우리 전쟁 목표의 일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독일로부터 떼어놓을 가망이 희박해지자 연합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국무 장관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요구했고, 1918년 6월에 윌슨 대통령은 “슬라브 인종의 모든 분파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