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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2_독후감

[2022-68] 유럽 도시 기행2

by 반란을_꿈꾸며 2022. 8. 9.

 : 유럽 도시 기행2

 :유시민

 : 생각의 길

 : 2022/07/31 - 2022/08/07

 

유시민 아저씨의 유럽 도시 기행기..

정치하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이제 이렇게 편안한 책을 쓰시면서 사는 모습을 보니 참 좋다.

누군가는 더 정치로 봉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반대다.

문재인 대통령 정치하는 것도 반대였다.

그만큼 수고했으면 이제는 자신의 삶을 즐겨야 한다. 

이번에 방문한 도시는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이다.

드레스덴을 빼고는 내가 갔었던 곳이다. 특히 빈과 프라하는 여러번 방문했었고, 다시 가고 싶고, 살고 싶은 도시다.

돈만 있으면 이런 도시에서 어슬렁거리며 살고 싶다.

겹치는 동선도 있고, 나에겐 생소한 곳도 있다. 

다음에 가게 된다면 방문해야지 하고 스크랩을 해놓은 곳들도 있다.

같은 곳을 방문했는데 이렇게 다르게 보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가고 싶다. 

 

 

p14 텍스트를 보지 않은 사람은 콘텍스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p33 2021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넘은 오스트리아는 제약,엔진,석유화학을 비롯한 제조업이 GDP의 30%를 생산하는 강소국이며, 금융, 유통,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산업 선진국이다

p35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 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폼메린이다

p48 성벽을 해체한 이후 50년 동안 빈의 인구는 네 배가 넘는 2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소수의 왕족과 귀족, 신흥 자본가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중세도시는 없어졌다

p51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혁명, 제정 철폐와 공화정 수립, 독일 합병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등 정치적 격변이 벌어질 때마다 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립시설이 된 예술사 박물관은 호프부르크 구왕궁의 보물 전시실과 노이에부르크 신왕궁의 에페소스 박물관 등과 묶어 운영한다

p57 예술사 박물관이 더러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 광할한 사막이었다면 제체시온은 제 성정대로 자란 오솔길 같았다. 예술사 박물관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느 작품도 다른 것과 같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풍성했다. 예술사 박물관에서 수백 년 동안 빈을 지배했던 낡은 문화를 보았고, 제체시온에서는 19세기 후반 등장한 새로운 예술과 사상을 만났다

p65 물론 빈 시민들만 시씨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오스트리아 국민, 심지어 이웃 헝가리 사람들과 발칸 지역 사람들도 시씨를 사랑한다.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부인 엘리자베트 아말이에 오이게니 또는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애칭이다

p82 확실히 축제라는 건 어디서나 모여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는 행사임이 분명하다. 모듬 생선구이, 감자볶음, 연어 철판구이와 치킨을 안주 삼아 맥주와 적포도주를 마시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p89 그 조형물이 공화국 수립을 기념하는 데 적합한지를 두고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과 찬반논리의 요지를 알리는 텍스트였다. 더 특별한 것은 그 안내문을 만든 것이 시의회의 결정에 따른 조처임을 알리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빈 시의회는 다수파의 지배를 승인하면서도 그런 방식으로 소수파의 주장을 존중한 것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성숙한 민주주의라고 하던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p92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의 곡선과 자연의 색을 존중했고, 흙, 숯, 돌, 벽돌과 같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해 예술적 감정을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직선의 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다

p104 머저르 민족주의와 기독교 문화를 상징하며 예나 지금이나 부타페스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p108 지하철 M1은 대중교통 수단이라기보다는 문화유산 또는 관광상품이었다. 언드라시 거리는 지금도 교통체증이 없는데 그 옛날에 왜 굳이 지하철을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노선길이가 4킬로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는 M1은 요즘 보기 드문 저심도 지하철이라 타고 내리는 재미가 있었다

p117 동유럽에서 독일 번호판을 단 자동차는 절도단의 표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렇게 낡아빠진 차까지 가져갈 줄은 몰랐다. 찻값은 나중 보험사에서 받았지만 빈의 제체시온에서 산 클림트 그림 포스터, 치킨전문점 비너발트 본점에서 어린이 손님 선물로 준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오두막, 부다페스트 리스트 기념관에서 구입한 클래식 음악 CD, 여행 내내 찍었던 사진 필름은 되잦을 길이 없었다

p120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헝가리 사람이라 하기 어려웠고 음악도 헝가리 음악이 아니었다. 빈,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 전역의 여러 도시에 장기 거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유럽인이었다

p122 자기네가 당했던 부당한 억압의 역사는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이중제국 시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민족들의 독립투쟁을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짓밟은 일이나 영토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나치 독일과 손잡았던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사를 일관성있는 태도로 소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130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던 빈과 헝가리왕국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그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빈이 정장을 입고 반듯하게 걷는 신사라면 부다페스트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아무데나 앉아서 노는 청년 같았다

p134 언드라시는 10년 넘게 총리직을 수행한 후 일선에서 물러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890년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이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유럽의 정치정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헝가리 사람이었고 머저르공화국의 기초를 만든 정치인이었다. 미학적으로는 칭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언드라시 기마상은 그가 헝가리 국민의 마음에 심어준 민족 자부심의 크기를 반영한 것이다

p139 1989년 6월 부다페스트에서 치른 너지 총리의 뒤늦은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참석해 애도했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국회의사당 마당에서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도나우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김춘수 선생의 시를 떠올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그 정치적 참극을 나는 그 시로 배웠다

p145 부다페스트에는 바실리카보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데가 없다. 부다페스트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치터델러에 가야 한다

p158 궁이라고 하고 성이라고도 하지만 괴델레는 궁도 성도 아니었다. 황후가 즐겨 찾은 시골 별장이라고 하는 게 적당할 법했다. 집도 가구도 정원도 호프부르크나 쇤부른 궁전에는 비할 수 조차 없을 정로도 작고 소박했다

p160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1천 년 전 말을 타고 거기 왔던 머저르의 후예들이 지난 150여 년 동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큰 도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도시가 좋다.

p172 브라헤는 망원경이 없던 시대에 천문학자로 활동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관측 자료를 작성했다. 브라헤의 조수였던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자료를 활용해 태양계 행성의 타원형 구조, 공전속도, 공전주기에 관한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보편적 물리법칙을 세운 뉴턴의 시대를 예비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카톨릭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외국인 과학자를 왕실 성당에 안장했으니, 프라하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p176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p182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에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p186 13세기에 초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이 시너고그는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 예배당 중에서 제일 오래되었다. 여러 차례의 화재와 박해, 추방, 재개발, 나치 점령 등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박물관으로 바뀐 다른 예배당과 달리 지금도 프라하의 유대인들이 여기서 예배를 본다

p193 카렐교는 다리가 아니라 광장같았다

p195 굴라쉬는 두껍지 않게 토막 친 쇠고기를 졸인 음식으로 으깬 감자와 함께 먹는데 매운 파프리카를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만드는 부다페스트의 굴라슈와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 다른 음식이었다

p199 바츨라프의 기마상을 광장에 세운 것은 그가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군주여서가 아니라 고대 신화에 나올법한 비극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p202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오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p204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잡혀가고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이 굴복했는데도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운 시민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밖에서 응원한 것은 동독 시민들뿐이었다. 소련의 침략을 규탄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을 응원하는 시위를 하다가 1천 명이 넘게 체포 구금되었다

p231 프라하의 마지막 일정은 블타바 재즈보트였다. 저녁 여덟 시 반, 아직 어둡지 않은 시각에 시내 선착장에서 출발한 재즈보트는 우리나라의 관광버스 비슷했다. 아래층 선실에서 밴드가 두 시간 반 내내 공연을 했다

p241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 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 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p256 2005년 2월 13일 성모교회느 ㄴ공식 부활했다. 안에서는 60년 전 그날의 폭격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었고 광장에는 6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던 폐허가 시민의 자유와 독일의 통일을 상징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p261 문화궁전의 외벽에는 사회주의체제의 유산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초대형 벽화가 있었다. 1969년 동독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드레스덴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린 벽화의 제목은 <1849-1969: 드레스덴혁명 세력의 진보와 사회주의를 향한 120년의 투쟁>인데,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만 할 수 있다든가 우리가 역사의 승자라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암송하던 문장을 적어두었다

p271 1871년 통일할 무렵부터 나치가 집권한 시기까지 독일은 과학 분야의 세계 최강국이었다. 나치가 사상과 학문 연구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유대인을 학살함으로서 걸출한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하게 하지 않앗다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p279 드레스덴은 공정왕 아우구스트 시대에 바로크 도시 또는 엘베의 피렌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때는 엘베 양안에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 집이 빼곡했다. 하지만 구시가지의 역사적 건축물과 볼거리를 만든 지배자는 다른 아우구스트 1세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데어 슈타르케, 원조 아우구스트 1세다

p291 도대체 무슨 축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남이 뭐라 하든 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듯했다. 여긴 독일인데 이럴 수가, 독일 사람들이 질서와 규칙이라고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행동을 하다니!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