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
작가 : 닐 웬본
번역 : 김병화
출판사 : 포노
읽은날 : 2020/09/30 - 2020/10/10
바흐를 발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했던 작곡가 멘델스존.
금수저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았던 사람.
그러다보니 스토리가 없어서 그런가? 음악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는다.
천재끼를 보면 모차르트보다 더하다는 그의 일생과 작곡을 연대순으로 쓴 책..
쉽게 말해서 위인전이다.
기록이 꽤 자세해서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배울 수 있다.
이때까지 멘델스존이 파니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일찍 사망한 줄 알았는데 이미 그전부터 과로를 해서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집안에 있는 유전적인 연약함, 과로, 사랑하는 파니의 죽음등..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었을텐데 참 아까운 천재의 죽음이다.
멘델스존의 음악을 다시 찾아 듣게 만든다..
P21 미국의 평론가 고 허버트 쿠퍼버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가문은 문화계의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가문의 역사와 전통은 멘델스존의 자기인식과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P26 어린 펠릭스는 적어도 한 번 이상 길거리에서 "유대인 꼬마"라는 야유를 받았다
P28 펠릭스는 루터교 신앙(그가 평생 지니게 되는)에 더하여 야콥과 루트비히라는 기독교식 이름만이 아니라 세례성이 바르톨디까지 얻었다
P31 아브라함이 자녀들을 위해 구상한 교육 프로그램은 철저했고 또 지칠만큼 많았다. 그 일정표를 보면 펠릭스는 평일에는 거의 잠시도 자유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 같은데, 평생 무엇인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은 분명 그때문이었을 것이다
P36 이런 비교가 그리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의 많은 평론가들도 1820년대 초반의 멘델스존의 음악이 같은 나이의 모차르트의 것보다 더 대단한 성숙도와 개성을 보였다는 데 동의했다
P39 헨젤 본인도 간혹 자기 아내와 처남 간에 오고가는 이야기가 마치 암호 같아서 알아들을 수 없다고 느꼈고, 남매간의 잦은 의견불일치가 연인들간의 사랑싸움 같은 분위기와 활력을 띨 때가 많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P48 프랑크푸르트에서 펠릭스는 자신과 비슷한 음악 신동인 열 살난 페르디난트 힐러를 만났는데, 힐러는 앞으로 오랫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하나가된다
P53 첼터는 프리메이슨 식의 행사에서 펠릭스를 "음악인 형제단체, 즉 모차르트, 하이든, 파파 바흐의 이름을 건 집단의 독자적인 동지"로 선언하고, 그에게 "거장이 될 때까지 계속 노력하라"고 격려하는 연설로 그 행사를 기념했다
P59 펠릭스는 그 제안을 사양했지만, 펠릭스에 대한 케루비니의 믿음을 본 아브라함은 과연 음악가가 아들에게 적합한 경력인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P60 프랑스 수도에서 굉장한 청중을 끌어 모으는 피아노의 대가 여러 명 가운데 하나였던 열네 살 짜리 리스트를 "손가락은 많은데, 두뇌는 거의 없어"라고 평가했다
P62 그러면서도 똑같이 활기찬 3악장에서는 멘델스존의 특징이라 할 스케르초가 성숙기에 도달한다
P66 이 특별한 새 거처는 멘델스존 일가가 스스로 설정한 반 은둔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갈수록 민족주의 분위기가 거세지는 독일에 사는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베를린의 상류사회에 속했지만 동시에 격리되어 있기도 했다
P74 베토벤의 모델은 여기서 멘델스존에게 자극을 가하여, 흔히 그의 특징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 두드러진 혁신들을 시도하도록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P78 한여름 밤의 꿈은 11월에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서 펠릭스와 파니의 피아노 이중주로 처음 소개되었다
P80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가 느낀 굴욕감은 깊었다. 예정되어 있던 2차 공연은 취소되었고, <카마코>는 그의 생전에 다시는 재공연되지 않았다
P82 그런 비평적 견해 차이는 분명히 가족 내에 실제로 감도는 긴장감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펠릭스의 다음 작품이 베토벤의 정화된 후기 스타일에 가장 깊이 젖어든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정신적으로 더 강하게 독립해가고 있다는 징표였다
P89 1829년에 있었던 멘델스존의 바흐 <마태 수난곡> 부활은 음악사에서 거의 전설적인 지위에 오른 사건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한 전통적 설명을 미묘하게 수정하고 있지만, 그 행사는 음악의 정전 일반과 특히 바흐 음악에 관해 여전히 세기적인 사건이다
P92 스폰티니의 소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바흐의 생일인 3월 21일에 두 번째 공연이 마련되었고, 이번에도 공연장은 만원이었다
P104 타고 가던 마차가 뒤집어져 다리가 끼었고, 이 부상 때문에 그는 두 달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그랬으니 매우 안타깝게도 누나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P113 베를리오즈로 말하자면, 그는 멘델스존을 작곡가로서 최고의 존경심으로 대했다. 비록 12년 뒤에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뒤에는 그가 음악적으로 "죽은 자들을 좀 너무 많이 좋아한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말이다
P121 음악가들이 저를 좋아하고, 제가 와서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P135 대개는 규율이 부족한 음악가들을 훈련시켜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헨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 인근 도시들의 도서관을 뒤져 적합한 종교음악을 찾아내는 일 등이 그의 업무였는데, 그런 종교음악에는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팔레스트리나와 라수스 같은 작곡가들이 쓴 미사곡과 모테트도 있었다
P147 그가 10월 중순경에 모셸레스와 함께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 갔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마 심장마비였던 것 같은데, 이 병력은 멘델스존 일가에 내려오는 유전병 경향으로 보인다
P158 그와 세실은 모두 자기들이 타고난 지위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고 그 세계 안에 갇혀있었다
P177 기본적으로 아주 다른 작품들을 동시에, 혹은 빠듯한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써내는 재능이 멘델스존의 평생에 걸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피아노 삼중주 직후에 씌어져서 8월 9일에 완성된 기념비적인 시편114, Op 51도 그런 예이다
P186 직업적 성공에 가정적 은혜까지 더하여, 1월에는 멘델스존의 세 번째 아이인 파울 펠릭스 아브라함이 태어났다.(그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도 화학 분야의 거대기업인 아그파를 설립했다)
P205 멘델스존이 죽은 지 3년 뒤에 가명으로 발표한 악명 높은 논문 <음악에서의 유대정신>에서 바그너는 독일에서 창궐하게 될 미학과 반유대주의의 악랄한 혼합물이 나치 치하에서 정책으로 확정되기 수십년 전에 이미 평론으로 자리잡도록 만들었다
P214 그의 수많은 걸작이 그렇듯이, 이 협주곡도 여러 해 동안 가의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개시부 악상이 그에게 처음 떠오른 것은 멀리 1838년 여름이었다
P224 그녀와 멘델스존 간에 발전한 호감(세실은 이 때문에 불편해졌지만)은 작곡가의 생애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도 전기 작가들에게 많은 화제와 추측의 소재를 제공했다
P228 엘리야는 성 바울보다 더 훨씬 더 위력적이고 안정된 작품이지만, 독창곡 몇몇(예를 들면 오바이아의 온 마음을 다하면서, 천사가 부르는 주에게서 휴식하리라 등)은 빅토리아 시대 경건함의 특징이라 할 매끄러운 분위기와 결부됨으로써 심각한 약점을 갖게 되는 것 같다
P233 멘델스존은 5월 12일에 프랑크푸르트에 돌아왔다. 이틀 뒤, 베를린에 있던 누이 파니는 일요 음악회를 위해 <첫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의 리허설을 하던 도중에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발작의 징후였다. 그녀는 저녁에, 마흔 한 살로 죽었다. 이 소식을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동생에게 5월 18일에야 당도했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쓰러졌다
'독후감 > 2020_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64] 달러구트 꿈백화점 (0) | 2020.10.17 |
---|---|
[2020-63] 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 (0) | 2020.10.12 |
[2020-61] 적당히 가까운 사이 (0) | 2020.10.06 |
[2020-60] 노화의 종말 (0) | 2020.10.03 |
[2020-59] 달 너머로 달리는 말 (0) | 2020.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