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작가 : 정기문
출판사 : 책과함께
읽은날 : 2021/06/07 - 2021/06/16
청소년 이상이라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서양고대사 입문서.
문체도 어렵지 않고 내용도 관심가질 수 있는 내용이라 쉽게 읽어나갈 수 있다.
대신 최근 고고학에서 연구되고 발굴된 성과들은 아직 실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헝가리쪽에서 나왔다는 다하우 문명이라든가 스키타이 지역의 유물들에 대한 최근 성과는 없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읽었던 세계사의 내용과 잘 align되어 있어서 편안하게 읽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문명의 원류라고 하는데 사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미케네 문명이 원류 아닌가?
서양 문명이 동방에서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서양인들의 잘못된 우월의식이 그리스 로마 문명을 과도하게 띄운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은 확실히 본받을 게 많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모습이 많이 오염되긴 했지만 이런 책을 통해서 잘 보정될 수 있다.
입문서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p8 282개 조항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사람들의 신분과 경제 형편을 고려하여 규정을 만들고, 고아나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개념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p19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이 도시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그들을 먹여 살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려면 농업 생산성이 높아야 했다. 따라서 도시가 건설된 곳은 농업 생산성이 높아서 잉여가 풍부한 곳이었다
p21 메소포타미아인의 삶은 항상 불안했다. 자연재해와 전쟁에 시달리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현세의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결과 메소포타미아인은 내세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세 중심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p27 나중에 세밀한 조사를 해보니 우르 지역의 해안가 전체에서 이런 점토층이 발견되었다. 우르의 해안가 넓은 땅에서 소금기를 포함한 점토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대홍수가 해일이었음을 의미한다
p35 바벨탑은 바빌로니아인이 세운 거대한 건축물로, 바빌로니아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성경은 거대한 탑을 쌓은 것을 왜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을까? 바벨탑이 다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p41 사르곤의 정복 사업으로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통일제국이 건설되었다. 사르곤의 사후에 아카드 제국은 더욱 넓어졌다
p48 상위 지도자들만 철제 무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인과 달리, 철제 무기 제작법을 개량하여 모든 군인을 철제 무기로 무장시켰다. 따라서 철제 무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리고 앗수르나시르팔2세는 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도록 병사를 훈련시켰다. 그는 훈련된 기병을 기병대로 조직해 역사상 최초로 전투에 투입했다.
p51 기원전 612년 메디아 왕국과 신바빌로니아 동맹군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했다. 아시리아의 전 국토가 철저히 약탈당했고, 아시리아인은 모두 노예가 되거나 처형당했다. 약탈과 보복이 어찌나 철저했던지, 아시리아가 그 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내기 불가능할 정도였다.
p56 기원전 1세기에는 대롱처럼 불어서 유리잔을 만드는 기술도 개발했다. 흔히 로마가 만든 유리가 비단길을 통해 중국은 물론 한반도까지 전해졌다고 하는데, 로마 시대 유리 생산은 페니키아인이 주도했다
p61 구약성경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관찰되는데, 이시기 성경을 저술한 유대 지식인들이 바빌론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p69 페르시아가 이렇게 여러 나라의 문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보고 헤로도토스는 "어떤 나라도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을 기꺼이 채택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p76 그는 타원형의 틀인 카르투슈 안에 파라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이름들을 수없이 비교하면서 이집트 문자가 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표음문자임을 깨달았다.
p78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7월 중순부터 홍수가 끝나는 11월 중순까지는 충적평야 전체가 물에 잠겼다. 이집트인은 이 시기를 아케트, 즉 '범람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p86 그 스핑크스는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난 후 남은 바위산을 다듬어 만든 것이다
p86 고대 이집트인은 약 120기의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지만, 현재 27기만이 남아있다. 이집트를 침략했던 외국인들이 이 건축물에 매료되어 많이 약탈해 갔다. 로마에 13기가 있으며, 파리, 런던, 뉴욕, 이스탄불에 각각 1기가 있다.
p88 그들은 투탕카문의 무덤을 거의 원형 그대로 발견했다. 무덤이 얼마나 잘 보존되었던지, 죽은 왕의 관(세 번째 관)) 위에는 3200년의 세월을 이겨낸 수레국화 한다발, 나뭇잎, 과일이 얹혀 있었다
p99 기원전 2649년경 제3왕조 이후 500여 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한다. 제3왕조의 대표적인 왕인 조세르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최초로 건설했다
p101 중왕국 시기에 거대한 피라미드는 건축되지 않았다. 대신 농경에 필수적인 수로와 관개 시설 등을 개량하는 공공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p103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이집트의 이미지는 대부분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거의 파괴된 반면, 신왕국의 유물은 많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p109 람세스 2세는 전투에 패배했지만, 이집트로 후퇴한 후 자신이 승리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문을 만들어 전국 곳곳에 게시했다. 당시에는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나라 밖에서 왕이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아무도 람세스 2세의 사기 행각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p115 그녀가 냉철하고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이렇듯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패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야먕이 큰 여자였다. 그녀의 이미지에서 간과되는 부분은 그녀가 이집트의 통치자였으며, 이집트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군사적으로 약했지만 지중해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p122 그리스인이 크레타인에게 공물을 바쳤고, 테세우스가 그것을 중단시켰다는 신화는 미노스인이 기원전 1400년까지 그리스 지역을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p124 고대 근동의 예술품과는 달리 미노스의 예술가들은 살육과 약탈의 장면이 아니라 꽃이 활짝 핀 풍경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운동 선수의 아슬아슬한 묘기나 축제의 모습 등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경을 그렸다.
p131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해외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인은 기원전 8세기 후엽부터 멀리 남프랑스와 북에스파냐까지 진출했다.
p132 그리스 일대가 혼란에 빠지면서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00년경 멸망했다.
p151 이오니아학파가 최초로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서 자연의 구성과 작동 원리를 설명해보려고 시도했다. 이 점에서 이오니아학파는 최초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이었다
p160 플라톤이 엘레이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p174 연극 공연이 형식을 갖춰가던 기원전 5세기에 디오니소스 축제는 아테네의 중요한 축제로 해마다 3월 말에 열렸다
p180 연극은 실로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신, 사회와 개인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그리스 연극에 농축되어 있다
p182 그리스인의 이런 사유는 자기중심으로 다른 문명을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선구라고 볼 수 있다
p190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기원전 594년 귀족과 평민은 솔론을 조정자로서 아르콘에 임명하는 데 동의했다. 솔론은 귀족 출신이지만 상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귀족은 그가 귀족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고, 평민은 그가 고생하며 장사를 해봐서 평민의 상황을 잘 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p196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한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미워했고, 그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과장해서 서술했다. 따라서 참주는 결코 포악한 지배자가 아니라, 귀족의 이익에 반해 평민을 위해 통치한 지배자였다
p202 그들의 병력은 약 30만 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군은 전투 병력이 약 260만명, 전투보조원이 약 260만 명에 달했으므로 총 병력은 520만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의 병력 숫자는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제시한 것인데, 상당한 과장이 있었다고 해도 페르시아군이 역사적인 대병이었음은 틀림없다.
p209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p217 화려하게 꽃핀 아테네 민주정은 아테네의 제국주의 덕분이었다. 군사력을 앞세워 이웃 국가들을 위협해서 얻은 부를 자신들 내부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원전 5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걸쳐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문화 중심 국가가 되었다
p219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는 아스파시아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수사학을 배웠으며, 페리클레스의 명연설문을 실제로 작성한 사람도 아스파시아였다고 명확하게 진술했다.
p250 테베레강 남쪽에 라티움 평야가 있었고, 로마느 ㄴ이 평야의 곡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는 해안 지역에서 생산한 소금을 테베레강을 따라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판매했다. 이렇게 로마는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p258 로마에서는 가부장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강했기 대문이다. 에트루리아 여성의 높은 지위에 격분한 로마인은 이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p268 로마는 귀족과 평민을 각각 대변하는 원로원과 민회를 양대 권력 기구로 만들고, 귀족과 평민이 서로 견제할 수 있게 했다.
p281 삼니움과의 싸움에서 로마인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조급했다는 것이다. 로마인은 전투를 너무나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니움인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p304 가장 인기 있는 옷은 중국산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단옷을 입은 여인네들은 몸매가 원히 들여다보였다.
p307 로마 시민들이 농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몰려들고, 그 자리를 노예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을 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p315 가이우스 그라크수의 곡물법은 세계 최초의 복지 입법이다.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에게 곡물을 싸게 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p323 급료와 토지 외에 병사들이 기대했던 것은 전리품이었다. 반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둘 경우 장군들이 약탈을 허락한다면 단단히 한몫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병사들은 국가가 아니라 장군들에게 충성하게 되었고, 군대가 점차 사병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p331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로 끌려가 죽었지만, 켈트족의 영웅으로 역사에 남았다. 근대 프랑스 사람들은 베르킨게토릭스가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발굴해 유적지로 조성하고, 프랑스 곳곳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p344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원로원과 인민에게 넘겨주는 시늉을 했을 뿐이며, 실제로는 왕처럼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다. 하여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시늉이라도 권력을 양보한 데 감사하여 그에게 '존엄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p348 아우구스투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수립할 때까지 수많은 프린켑스가 존재했다. 네로, 트라야투스,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 등등. 흔히 이 사람들을 로마의 황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황제의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 제1시민이었을 뿐이다.
p356 키케로는 라틴어로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품격을 희랍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58권의 연설문, 웅변술에 관한 일곱 권의 저서, 20여 권에 달하는 철학서와 수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라틴어를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뛰어난 언어로 만들었다
p361 로마는 다른 종족을 정복할 때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다른 종족의 수호신을 초대했다. 로마인은 다른 종족의 수호신에게 로마에 그들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로마인이 적절한 의례를 행하겠다고 맹세했다.
p380 기독교는 야훼가 종족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해준다고 가르쳤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고대 종교를 무너뜨리고 인류 종교사에 새 장을 열었다
p389 로마인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고발한 이유는 그들이 로마의 다신교 의례를 방해했다, 황제 숭배를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로마의 전통적인 도덕을 무시했다 등이었다
p401 율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임종 때 두 아들에게 "화목하게 지내라. 병사들을 부유하게 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3세기가 군인들의 시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p406 동서로 갈릴 후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동로마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흔히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불리는 동로마제국은 어디까지나 로마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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