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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1_독후감

[2021-75]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by 반란을_꿈꾸며 2021. 7. 29.

 : 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 노명우

 : 북인더갭

 : 2021/07/21 - 2021/07/27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유럽을 이렇게 느낄 수도 있구나 하는 책..

관광지로 느끼는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의 맨살을 보기 위해서 깊숙히 들어가버린 느낌..

그래서 이미 가본 도시들이지만 낯설게 느껴진다.

저자의 사는 모습을 보면 약간 주변인 같은 느낌이 든다. (나만 그렇게 느끼나?)

책을 읽다보면 주변인이 화려한 도시를 보며 느끼는 낯섦과 소외를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 좋다..

나도 이렇게 살아봤으면... 

 

p19 한때 유학생이었던 사람은 귀국하여 학자라는 지위를 얻고 난 후에 자신의 유학시절을 낭만적 색채로 채색하고 자신을 영웅화하는 경향이 있다.

p41 별도의 방에 특별 전시되고 있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랑거리 '반가사유상'처럼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자연사박물관의 전시동선에서 살짝 어긋난 방에 모셔져 있다.

p46 마리아는 아버지가 동굴 발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동굴의 이곳저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리아가 소리쳤다. "아빠! 여기봐! 소가 있어" 1879년의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의 조상이 남긴 흔적과 드디어 조우했다.

p61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여기에 있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핸드 프린팅, 이렇게 기원전 3만 7천년의 호모 사피엔스는 1994년의 호모 사피엔스에게 인사했다.

p73 쇼베는 먹을 것을 저장하는 저장고가 아니다. 주술적 목적이든 장식적 목적이든 상관없이, 쇼베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생존이라는 틀을 벗어난 행동이다.

p78 사실 인간의 역사가 그렇다. 인간은 인간을 그리기 전에,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전에, 인간성을 형상화하기 전에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신 그리고 신성을 그렸다.

p96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상식과 충돌했다. 황제를 신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제국의 관점에서, 황제가 아닌 신을 하느님이라고 떠받드는 로마제국의 관점에서, 황제가 아닌 신을 하느님이라고 떠받드는 기독교는 이단과 다름없었다

p104 그의 권력은 앱스 근처에 자신의 모자이크를 남기고 자신의 무덤을 앱스 밑에 두면 혹시라도 구원의 가능성이 좀더 커지지 않을까라는 기대에 국한된다. 인간이 제 아무리 권력을 가져봐야 그 권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다

p108 마우솔레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방문객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마우솔레움의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주요 색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p110 권력이 있다고 죽음이 인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유한성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단지 권력이 있음과 없음에 따라 죽음에 대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권력자는 권력을 이용하여 죽음이라는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p131 피렌체에 오는 사람은 피렌체가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온다. 현재의 관광도시 피렌체는 15세기의 피렌체를 판매한다

p150 피렌체의 21개 길드가 오르산미켈레의 파사드를 각 길드 수호성인의 조각으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p160 슈퍼마켓에서 산 맛없는 빵에 잼을 발라서 끼니를 때웠고, 피곤해도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젊은이는 그래도 추해 보이지 않는다. 때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젊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p172 할아버지 코지모는 예술을 위해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었다면 손자 로렌초는 예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p189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는 자신의 고향이 아니라 빈을 선택했다. 빈은 그래서 특별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브람스가 선택한 도시이기 때문에.

p193 우리는 모차르트를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천재 혹은 마에스트로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차르트의 사후 명성일 뿐이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대에 음악가는 궁정에 소속된 수많은 하인의 한 종류로 받아들여졌다.

p214 그의 심층으로 들어가면 물건을 손에 넣고 싶은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진하고 철이 들지 않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귀족과 동등해지고 싶었던 모차르트의 충동을 발견할 수 있다

p220 2시간 이상을 미동도 없이 선 채로 음악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입석 관객들은 그렇게 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다.

p226 충분히 넉넉한 과거를 만끽했고 현재에서도 어떤 부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굳이 미래에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

p236 빈은 그를 지휘자로서만 인정했다. 말러는 작곡가로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p243 탐미는 탐욕보다는 교양적 행동으로 보이나, 모든 탐미가 탐욕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탐욕은 때로 생존을 위한 인간 본성이라고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이유없는 탐미는 탐욕보다 때로는 더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다

p246 이 건물은 빈에 충격을 주었다. 호프부르크 앞에 이렇게 장식이 완전히 결여된, 오로지 비율에 의한 조화만을 미적 요소로 간직한 건물이 들어선 것 자체가 스캔들이었다.

p249 크라우스는 작가였고 쇤베르크는 음악가였지만 그들은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충동을 공유했다. 장식을 거부했던 아돌프 로스 역시 크라우스의 영향을 받았기에 그 세 명의 인물은 각자 활동 분야는 달랐지만 분리를 지향하는 빈의 예술가 정신을 상징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p254 모차르트를 발견하기 위해 빈에 왔지만, 빈을 떠날 때는 쇤베르크와 함께 떠난다

p264 유럽의 모든 궁정이 부러워하며 닮고 싶어하는 베르사유 궁전, 불안과 근심을 피해 지은 베르사유 궁전, 그 궁전을 이제 루이 14세는 허수아비 왕으로 살아왔던 어린 시절, 마자랭과 어머니의 관계를 수군댔던 궁정귀족에게 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왕의 위엄을 전신하는 쇼케이스로 삼고자 했다

p267 쥐소코르(정장 외투) 칙허장은 루이 14세의 발명품 중 하나였다. 그는 1661년 12월 23일, 그 다음해에 이 옷을 선물 받을 사람의 명단을 발표했다. 고작 40명뿐이었다. 리미티드 에디션은 예나 지금이나 탐심을 불러일으킨다. 귀족은 서로 이 옷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p273 파리는 물질적 도시가 아니라, 환각이 공간화된 도시이다. "황제와 장관들은 파리를 프랑스의 수도만이 아니라 세계의 수도로 만들기를 원했다"

p275 모두가 눈요기라는 보들레르의 탄식은 짧지만 가장 정확한 제2제정기 파리에 대한 묘사이다. 파리는 제2제정기 동안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p280 파사주가 몰락할 즈음 파리 곳곳에 백화점이 솟아올랐다. 1852년에 르 봉 마르쉐가 문을 연 이후, 루브르 백화점이 1855년에 문을 열었다.

p295 카페에는 제2제정기의 경제적 번영에서 밀려난 고단한 사람들이 모인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카페에 들러 초록빛 요정이라 불렸던 압생트를 한잔 마시는 것이 그들 삶의 최대의 위안이다.

p298 속물 부르주아는 시간을 아끼지만 댄디는 시간을 탕진한다. 댄디의 최대 적은 부르주아다. 댄디는 자신을 부르주아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p300 그때는 몰랐다. 라탱지구가 보헤미안의 거리인 줄. 어찌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제격의 장소를 정했던 것이다. 그때는 막연하게 보헤미안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젠 닮고 싶은 작가들의 흔적에서 뭔가 자극을 얻고자 라탱지구를 찾는다

p318 파리는 제2제정기를 관광객에게 판매한다. 관광객이 기대하는 파리는 그렇다. 제2제정기 때의 그 소란함은 사라졌다.

p326 사람들은 말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도시가 아니라, 베를린일 뿐이라고

p330 베를린에선 가장 번성했던 순간과 가장 야만적이었던 순간이 일치한다. 그것이 베를린만의 유일함이다. 그래서 베를린은 파리처럼 자신의 유일함을 대놓고 자랑하지 못한다

p338 그는 시민들이 정치 지도자에게 열광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자신의 예술체험으로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 논리의 힘이 아니라 열광이라는 경험에 의해 정치에 몰입할 수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p346 아름다운 대상을 아름답게 묘사하면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면 사실을 미화한 것이다

p353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던 가히 기이한 광경이다. 정당의 전당대회에, 그것도 나치당의 전당대회 전야제에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이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한스 작스처럼 나치당은 진정한 독일 정신은 예술혼에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p363 베를린이 완성되는 날 파리는 그림자로 변할 거야. 그러니 우리가 파리를 부술 필요가 있겠나?

p370 베를린에서 히틀러가 정치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사용했다면,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소비에트의 괴벨스 격인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내세워 자본주의적 서방에 직접적으로 맞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예술을 요구했다.

p378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오케스트라는 유흥이나 교양의 표식으로의 교향곡이 아니라 히틀러가 야만적인 전쟁을 벌일 때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레닌그라드를 소리로 표현했다. 교향곡 7번 연주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p390 군터 템니히는 유대인 희생자들이 살았던 집 앞의 보도에 발부리 아래의 돌을 설치한다. 그 명패에는 여기에 살앗다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텍스트가 새겨져있다. 그는 나치 희생자의 이름을 그가 살았던 집 앞에 새김으로써 구체적인 얼굴을 부여한다. 베를린에만 2020년 현재 8,689개의 발부리 아래의 돌이 있다.

p400 이 투구는 1875년 그리스 올리피아 제우스 신전 발굴 도중 발견되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라톤 우승자는 이런 선물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당시 우승자에게 전달되지 않은 이 투구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가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p403 주변 산은 높고 농지는 보이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외진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정정했다. 현대 도시인의 관점으로 평가하자면 가치 없는 오지로 보이겠지만, 반구대에 암각화를 만든 그들이 살던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이곳은 오지가 아니라 풍요로운 땅이었을 것이다

p408 서소문 역사공원의 자히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있고 이곳에도 각종 예술작품이 있지만 공원 한가운데 벤치에 설치되어 있는 티모시 슈말츠의 청동 주조 작품 노숙자 예수야말로 칠패로에 가장 적합한 예술작품이 아닐까 싶다

p415 국경은 예술-인간에게는 무의미한 경계다. 예술가는 가장 선구적인 코스모폴리탄이다

p419 어느 도시든 그 도시가 가장 화려했던 순간과 개방적이었던 순간은 일치한다. 백탑 주변에 조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견문한 사람들이 모여 수표교와 광교에서 이국의 바람을 남몰래 느낄 수 있었던 18세기 서울의 어느 달밤은 랑슈트라세로부터 분리를 주장했던 분리파의 공간이기도 했다

p423 한양의 풍속화가가 연달아 등장했을 때 파리의 댄디에 해당되는 예술가의 친구는 없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조금 늦게나마 예술가의 친구 전형필이 등장했다

 

p425 수많은 이들이 남산 1호터널을 오갔지만, 바로 터널 부근에 고문이 이뤄지던 곳이 있었음은 아무도 몰랐다. 도시는 그렇다. 바로 옆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감쪽같이 감출 수 있는게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