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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등사 주보

by 반란을_꿈꾸며 2023. 6. 13.

중학교 때 다니던 교회는 청소년부 예배가 토요일에 있었다. 

토요일에 학교를 다녀와서(그렇다. 내가 어릴 때는 토요일에 학교를 갔다) 잠시 집에 있다가 교회를 갔다. 

우리교회는 4시에 예배가 있었는데 예배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친교모임을 하고 헤어졌다. 

놀이문화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교회에서 게임도 하고 글도 쓰고 찬양을 하는 게 꽤 중요한 문화활동이었다. 

청소년부 순서지는 고등부에 있던 상복 누나가 만들었다. 교회활동에 열심이었던 상복 누나는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맨 채로 교회에 와서 청소년부 주보를 만들었다.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라 누나는 철필로 트레이싱 페이퍼에 한글자 한글자 써 내려갔다. 철필로 16절지 트레이싱 페이퍼를 2장 만들면 청년부 형이 등사를 했다. 롤러에 오일을 바르고 트레이싱 페이퍼를 내려놓고 힘을 주어 롤러를 문지르면 16절 갱지에 주보가 찍혔다. 

등사가 끝나면 순서지를 접어야 하는데 아직 덜마른 순서지를 접으면 손에 검은 오일이 그대로 묻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얼굴에도, 손에도 검은 오일이 묻은 채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상복 누나는 재주가 많아 잘 보이지도 않는 트레이싱 페이퍼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쓰면서 매주 주보를 만들어냈다. 

오동통한 얼굴에 웃는 모습이 참 이뻤던 누나는 글씨도 예쁘고, 글도 잘 쓰고, 풀빵도 잘 사주고...

갓 청소년부에 들어왔던 내게는 존경할만한 선배였다.. 

지금은 DTP 소프트웨어가 워낙 좋아 화려한 편집을 해서 컬러프린터로 멋지게 뽑아내지만, 등사를 엉망으로 해서 삐뚫어진 옛날 주보가 가끔 생각이 난다.

이사를 덜 다녔으면 그때 모아놓은 주보가 지금도 있어서 멋진 골동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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