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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3_독후감

[2023-64] 유럽사 이야기

by 반란을_꿈꾸며 2023. 12. 21.

제목 : 유럽사 이야기

 : D.H 로렌스

 : 페이퍼로드

읽은기간 : 2023/09/03 -2023/12/14

 

통속소설을 쓰던 양반이 이렇게 멋지게 유럽사 이야기를 쓴다는게 좀 신기하다.

유럽사의 통사로 읽는 재미가 있다. 

20세기에 살던 영국의 글쟁이는 자신들 유럽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지 알수 있다. 곰브리치 세계사와는 또 다른 읽는 맛이 느껴진다. 

역시 역사책은 여러 버전을 읽어봐야 한다. 내용이 방대하고 책도 길어서 휴가때 여유있게 몰입해서 읽으면 더 나을 것 같은 책이다.

 

p10 우리는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능력, 즉 사실에 순서와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으로서의 역사적 능력을 너무 확신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과학일 수도 있는-의 잡일에 불과하다. 진정한 역사는 참된 예술, 다시 말해 허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진실된 예술이다.

p32 수석 아우구스투스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 그리스 및 지금은 터키로 알려진 지역을 맡았다. 터키는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역사가 오래된 곳이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했으며, 갈레리우스는 다뉴브 강의 방어와 발칸 반도 통치를 맡았다. 또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스페인, 영국을 관장하면서 동시에 라인 강과 스코틀랜드 장성 방위를 책임졌다.

p55 로마의 시민들은 유대인의 성물들을 보고도 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민사상에 찌든 유대인의 광적인 자만심에 이미 혐오감을 품고 있던 이들에게 성물은 그저 보기에 좋은 보물 그 이상은 아니었다.

p72 로마 정부는 항상 모든 일에 공정하려 했다. 하지만 재판을 내릴 행정관들조차 기독교도들을 싫어했다. 그들이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부를 적대하기 때문이었다.

p84 로마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저 너머에는 위대한 생명력의 원철이라고 할 무리들이 둘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은 스키타이족이라고도 불리는 타타르족으로, 이들은 크림 반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말타기에 능하고 성질이 사나우며 피부가 검은 아시아계 인종인 유목민들로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들보다 로마에 좀 더 가까이 있던 종족은 발트 해 주변에 살았으며, 이들이 게르만족의 모체가 되었다.

p93 자유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는 게르만족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일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에게 족장은 전쟁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사람이었고, 가장 용감한 전사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이었다.

p108 로마제국이 내부적으로 파멸하고 있는 동안 외부에서도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다. 375년은 세계 역사에서 분기점으로 기록되는데, 이것은 광활한 미지의 아시아 대륙에서 훈족이 등장해 불가강을 건너 유럽으로 쳐들어온 해였기 때문이다.

p117 알라리크는 자신의 위대한 적수가 수치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리석은 호노리우스 황제와 교활하게 협상을 하는 척해서 라벤나가 조용히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틈을 이용해 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따라 곧장 로마로 쳐들어갔다.

p121 415년에 알라리크를 이어 왕이 된 아타울푸스는 로마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시킨 후, 서고트군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파괴를 일삼는 반달족을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원정은 성공했다. 그는 야만적인 반달족을 대파하고 북부 스페인에 왕국을 세웠으며,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정했다.

p128 우리가 언급하지 않은 위대한 야만족이 하나 있는데, 이들의 이름은 고대 세계전역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앞에서 375년은 세계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 해가 바로 훈족이 볼가 강을 넘어온 해였다.

p141 만약 452년에 아틸라가 마른 강 인근의 카탈루냐 평원에서 일어난 살롱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더라면, 유럽은 타르타르족의 통치 아래 들어갔거나 적어도 신의 회초리한테 아주 끔찍스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p143 항구 주변의 땅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사막이었다. 아필레이아 시와 인근 마을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얕은 바다 주변의 늪지대와 섬으로 숨어 들어가서 초라한 오두막을 짓고는 생선과 조개 따위를 먹고 살았다. 이것이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다 위의 도시, 베네치아가 형성되는 최초의 시작이 되었다

p160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는 300만 명의 갈리아인과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 중 100만 명은 죽었고, 100만 명은 노예가 되었으며, 나머지 100만 명은 자유인으로 남았다.

p178 전투는 프랑크군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엇다. 미친 듯이 흥분한 상태로 전쟁을 치르다가 자신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클로비스는 갑자기 집에 있는 왕비를 생가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만약 클로틸드의 신이 자기에게 승리를 준다면 그녀의 신앙을 받아들이겠노라고 외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기운을 얻어 돌진해서 적군을 휩쓸었고 전쟁은 판도가 바뀌었다. 알레마니군은 극심하게 패주하고 말았다.

p191 샤를마뉴는 여러 면에서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프랑스어로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모두 받았다. 훌륭한 건물이나 다리, 길도 많이 건설했고, 농업을 장려해서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막았다. 그는 신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세상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게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동시대 사람들 중 오직 하룬 알 라시드만이 그와 비교될 수 있었다.

p196 987년에 칼롤링거 왕조가 끝나자, 프랑스 공작 위그 카페가 자신이 프랑스 왕임을 선포했다. 이것은 그가 여전히 독립적으로 남아 있던 모든 공작들과 백작들을 이끄는 전쟁 사령관이자 지도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위그 카페와 함께 진정한 프랑스 왕국이 시작되었다.

p246 가엾은 알렉시우스 황제는 투르크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의 기독교 세계에 도움을 호소했다가 이제는 무섭고 파괴적인 우군이 줄을 지어 떼거리로 몰려와 영토를 짓밟는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p258 십자군은 사흘 동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했다. 피가 기독교도들의 발목까지 차올랐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예배당 안에 갇혔다가 불에 타 죽었다. 칼에 찔려 죽은 이슬람교도의 수는 70,000명에 이르렀다.

p295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다른 수도사들과 달랐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무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인류에게 사랑을 준다는 전제 하에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돕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p302 두 명의 교황이 생겨난 셈이었다. 우르바누스는 로마에서, 클레멘스는 아비뇽에서 교황청을 열었다. 하나의 교회 안에 두 파벌의 추기경들이 생겼고 교회의 행정부서도 둘로 나누어졌다. 이로 인해 유럽은 둘로 분열되었는데, 이 사건을 대분열(서방 교회의 분열)이라고 부른다.

p307 그들은 후스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1415년 7월 6일 고결한 심성을 가진 후스는 콘스탄츠의 시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 지기스문트는, 자신이 약속한 안전은 여행의 안전을 뜻한 것이며 콘스탄츠에서의 이단자 처형재판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p321 아마도 유럽의 역사 2,000년 동안 가장 놀라운 세기는 15세기였다. 이시기에는 이전 어느 시기에도 없던 위대한 화가, 시인, 건축가, 조각가, 과학자, 학자들이 존재했다. 이시기 사람들은 민감하고 예민하며, 열정과 상상력이 넘쳤으며,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었다.

p324 15세기 이후 국경이 고정된 경계선으로 정착될 때까지, 유럽은 하나로 통일된 교회의 영역이었다.

p332 단테의 위대한 시와 페트라르카의 시는 진정한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테프라르카의 친구들은 하찮은 이탈리아 말로 시를 써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고 그를 질책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라틴어로 감정을 표현한 글은 모두 잊혔지만, 당시에는 무시당했던 이탈리아어로 쓴 시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생동감 있는 작품으로 읽혀지고 있다

p365 투르크군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다른 여러 가지 분규들 때문에 황제는 개신교도들과 대치할 입장이 못 되었다. 황제는 이후 12년간이나 종교 개혁가들을 다룰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 사이 종교 개혁가들은 독일 안에서 대단히 강력한 세력을 다져나갈 시간을 벌었다

p387 그러나 루이 14세의 긴 통치는 재앙과 악평으로 끝을 맺었다. 오만한 군주는 예외 없이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 든다. 그러지 못하면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401 프랑스를 혁명의 도가니로 돌고 간 것은 사람들의 고통이 과도해서 아니었다. 물론 불가피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혁명의 원인이 된 것은, 눈부신 과거가 있었으나 그것은 사라졌고,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염원만 남아 있다는 정신적 분노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이 어리석음과 낭비를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였다.

p423 실제 정부의 운영은 루이 14세 시절과 마찬가지로 교육받은 부유한 시민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의 위치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혈통 대신 돈이 통치를 하게 된 것이 변화의 전부였다.

p442 1795년 3차이자 마지막이 된 폴란드 분할이 실시되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각각 자신들의 몫을 챙기고서는 폴란드라는 이름이 유럽의 지도 위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도록 하자고 약속했다.

p476 이탈리아에는 마치니와 가리발디 같은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열정에 가득 찬 이상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작게 분열된 나라들을 합쳐 통일된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찬 계획과 결심으로 가슴을 채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바로우르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p487 다음날 가리발디는 아쉬움을 남긴 채 카프레라 섬에 있는 농장으로 갔다. 가난했던 사람답게 가난을 택한 것이었다. 왕과 그의 일행은 가리발디가 떠난 것을 섭섭해 하지 않았다. 결국 가리발디같은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들 계급의 특권에 위협이 되며 왕가라는 몸에 박힌 가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p494 로마제국 다음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일어났는데, 이 제국은 바르바로사와 프리드리히 2세 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다시 사라졌다. 교황청은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대등하게 공존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 의해 교황들을 바티칸의 좁은 경계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p511 의회는 파리 시민들을 저지하기로 의결했다. 전쟁에서 막 돌아온 군대를 이끌고 티에르가 앞장서서 파리로 진구해 들어갔다. 프랑스 군대가 프랑스의 수도로 행군해서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직 파리에서 철수하지 않은 독일 군대는 두 패로 갈라진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싸움을 지켜보았다.

p514 생산적 노동자대중에 의해 통치되는, 그리고 모두가 물질적으로 평등한 위대한 통일유럽은, 한 사람의 위대한 선택된 인물, 거대한 전쟁을 이끌면서 폭넓은 평화를 다룰 수 있는 영웅의 주변에서 뭉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되고 굳건하게 남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