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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4_독후감

[2024-29] 당일치기 조선여행

by 반란을_꿈꾸며 2024. 6. 12.

 : 당일치기 조선여행

 : 트래블레이블

 : 노트앤노트

읽은기간 : 2024/05/31 -2024/06/06

 

재미있는 책이 출간되었다.. 

서울을 여행하는 책인데 서울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로 나누어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를 여행하게 한다.

조선시대는 아무래도 궁궐이 중심이 됐다. 서울에는 5대궁궐이 있는데 각 궁궐마다 역사적 내용과 관광 순서, 그리고 눈여겨볼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는 아무래도 서대문역사 박물관처럼 무거운 곳들이 많았다. 안타깝기도 하고 쉽게 넘기기도 어려운 부분들이 많지만 이런 역사가 있어서 우리나라를 독립으로 이끌었다는 걸 생각하면서 강하게 다녀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서울에 살아서인지 서울을 이렇게 깊이있게 다녀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가까운 곳일수록 더 소홀하기 쉬운데 이런 책을 읽은 기념으로 올해는 서울에 관심을 좀 가져봐야겠다..

재미있었다 

 

p38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왕조의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국가를 세우고 건국의 정당성을 필요로 하던 시점, 한 노인이 고구려의 별자리가 새겨진 오래된 비석을 이성계에게 바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새 왕조가 탄생하자마자 발견된 고대국가의 별 지도는 이씨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좋은 유물이었지요.

p46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명언이 조선의 왕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군의 면모를 보여야 했던 조선의 왕에겐 책임질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p53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김부식이 집필에 참여한 삼국사기 중에서 <백제본기 온조왕>편에 나와있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인용한 것입니다.

p64 우리의 전통 건축에는 차경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빌릴 차, 경치 격, 즉 빌려온 경치라는 뜻입니다. 서양인들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중시했지만 우리는 자연과의 조화를 함께 즐겼습니다. 조선의 건축물은 자연이란 배경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완벽해졌습니다.

p73 경복궁에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실제로 업무를 보던 편전이 바로 사정전입니다. 근정전이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한 공간이었다면, 사정전이야말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업무를 보던 곳이었습니다.

p93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쫓아가는고. 두어라 예 도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연산군일기 연산 12년 9월 2일) 충신들은 어디 가고 유배지 교동으로 가고 있는가? 일만이 되던 연산군의 기생 흥청들은 어디 두고 해 지는 길에 누굴 쫓아가는가? 그냥 둬라. 교동 또한 가시울타리 집이니 밤새워 놀기 좋고 조용히 죽기 좋지 않나?

p98 정당성을 깔끔하게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광해는 조선의 군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칩니다. 특히 세금을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과 토지 조사를 위한 양전 사업은 양반과 지주층의 반발이 거셌지만, 민심이 왕의 편에 섰기에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p115 다른 궁의 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자연히 조정 마당의 크기도 작습니다. 또한 왕의 궁궐은 남향으로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은 자연 지세에 맞춰 동향으로 지었습니다. 조선의 궁엔 삼문의 원칙이 있는데 정문에서부터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경궁은 그 과정을 축소해 흥화문과 명정문만 통과하면 정전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p140 1620년, 경희국은 공사를 마치고 야심 찬 역사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궁을 지은 사람은 조선 15대 왕 광해군이고, 당시 이름은 경덕궁이었지요.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술사의 말이 없었다면 경덕궁은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p144 서울역사박물관 뒤 주차장에는 놀랍게도 방공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궁궐 안에 박물관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방공호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p169 보태평은 종묘에 계신 조상신들의 문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국왕이 조상에게 첫 술을 올리는 초헌례의 순간에 연주했습니다. 반면 정대업은 조상신들의 무공을 찬양하는 노래로, 왕세자가 조상에게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아헌과 영의정이 마지막 술을 올리는 종헌에 연주했습니다.

p194 오조룡이 남긴 여운을 뒤로하고 중화전을 바라보던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보겠습니다. 궁 안에 이렇게 서구적인 건축물이 세워져 있어도 될까 싶은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돌로 만든 집, 석조전입니다.

p206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7년부터 자주 근대화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납니다. 바로 대한제국의 연호 광무를 붙인 광무개혁입니다. 광무개혁의 핵심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국방, 경제, 산업,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외세의 도움없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p214 초기엔 비슷비슷한 한옥 건축물을 사용하던 각국 공사관들은 인접한 타국 공사관을 의식해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합니다. 시간이 흐른 탓에 지금은 당시 공사관의 외관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남겨진 기록과 사진이 그 시절의 경쟁을 보여줍니다.

p221 정동제일교회의 역사는 188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언더우드가 자신의 집에서 집 없는 조선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면, 아펜젤러는 그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p238 경성역은 붉은 벽돌을 사용한 외관 때문에 한때 도쿄역을 본떠 만들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성역 축조 당시 도쿄대학교 건축과 교수였던 츠카모토 야스시 유품에서 서울역사 입면도가 발견되면서 스위스의 루체른역 모습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p246 1927년, 당시로는 아주 드물게 유럽 유학길에 오른 예술가 나해석도 이곳에 섰습니다. 그녀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대구와 수원을 거쳐 경성역에서 잠심 머무른 후 장춘, 하얼빈, 러시아를 거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나해것이 떠난 길은 머나먼 유학길이기도 했지만,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자 했던 그녀의 인생길인 것만 같습니다.

p265 기상 나팔 소리가 울리면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개고 젖은 수건을 짜서 몸을 훔치고 홀딱 벗은 뒤 문 앞에 선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달리다가 허들을 넘으면서 입을 아~하고 벌린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 입을 벌리는 건 입에 문 것이 없다는 증거다.

p286 그는 해례본의 정보를 알려주며 거래 중개를 맡았던 김태준에게도 중개 수수료를 1000원을 줍니다. 김태준은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며 우리글을 지키려 노력했던 사람으로, 훗날 간송에게 받은 돈을 중국 연안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합니다.

p292 성북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있습니다. 성북동의 운치를 담당하는 전통찻집 수연산방입니다. 오미자차, 단호박 팥빙수 등 대표적인 메뉴와 함께 고택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벼루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글을 쓰는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린 상허 이태준의 고택입니다.

p311 일제강점기 언론인이자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던 소설가였지만 변절한 친일파 이광수는 삼천리(1936)의 성조기라는 글에서 정세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늘 바짝 깎은 머리에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녔다고 말입니다.

p334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반응에 다시 주목해봅니다. 고종과의 대화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주춤했던 이유는 고려인의 무덤에서 청자를 꺼낸 이가 본인이었기 대문은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그는 대표적인 고려청자 수집가였습니다.

p339 당신은 세한도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정희 선생님을 존경하는 그대의 마음이라면 안심하고 전달할 수 있겠군요.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아무 대가 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3월 후지스카의 서재에 불이 나느데, 세한도는 이미 손재형에게 건네진 후였지요.

p345 화재로 공사관을 잃은 일제는 이듬해인 1885년 조선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한성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에는 조선이 일본에 공사관을 지을 수 있는 부지와 비용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