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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0_독후감

[2020-22]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by 반란을_꿈꾸며 2020. 5. 12.

제목 :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1

작가 : 클라이브 폰티

번역 : 왕수민 

출판사 : 민음사

읽은날 : 2020/04/03 - 2020/05/10

분류 : 일반

 

일단 그 두께에 한번 놀란다. 무려 853페이지다..

더 놀라운 것은 이만한 두께로 한권 더 있다.

코끼리 한점 한점 뜯어먹는 기분으로 한장한장 읽었다.

그 수많은 세계사 개론책에 또 한권을 더하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기존의 책들이 서양의 시각에서 씌여져 있기에 세계사의 내용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같이 그동안 세계사에서 빠져있었던 역사를 동등하게 다루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새롭게 알게된 내용이 참 많다. 알게된 내용이 많다는 것이지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 생소하고 머리에 잘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서양의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투에 우선 박수를 보낸다. 

그렇지만 아메리카의 역사를 서양역사와 동등하게 대우하기엔 우리가 아는게 너무나 적다.

실제로 스페인은 마야나 잉카문명을 가혹하게 파괴하여 그 이전의 역사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본다는 것은 신선하고 즐겁다. 

정착민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유목민의 역사도 담겨있어 유라시아가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아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또한 동남아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세계사에 기여한 바락 크다는 것도 배웠다.

다만 우리나라에 대한 부분은 내용도 빈약하고, 적혀있는 기록도 틀렸고, 시각도 왜곡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객관적이려고 노력한 서양역사가조차도 우리나라는 중국의 식민지, 좋게말해 중국영향권안에 있는 별볼일 없는 나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세계사에 기여한 것이 없으니까... 자업자득이다...

현대역사를 어떻게 보고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2권을 읽어야겠다...

 

P22 사회 진화론자였던 그는 문명이 유기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문명은 자연환경 속의 도전과 응전을 통해 등장하며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 속에서 탄생성장붕괴해체라는 공통된 주기를 겪는다고 보았다 

P25 제각각 달랐던  모든 인간 사회가 차츰 긴밀해져 하나로 뭉쳐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사를 이루는 핵심 내용  하나다 

P28 문명이라는 개념도 결국에는 최초의 농경 사회가 잉여 식량을 생산해 비생산자들(사제와 통치자군인장인) 부양하면서이로써   복잡하고 구조화되고 위계적인 사회가 탄생할   토대를 둔다 

P29 인간은 투자와 교역사업을 통해 수익과 이득을 추구하는데그러한 인간의 물욕은 역사 전반에 걸쳐 모든 사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P30 첫번째 주제는 세상에 제각각 등장한 문명들이 어떻게 서서히 서로 접촉해 갔는지다 

P33 세계사를 이루는 다섯 번째 주요 주제는 바로 교역이다 

P35 전환의 기반은 유럽이 유라시아 나머지 지역의 기술과 사상을 광범위하게 채택한  있었다 

P37  책의 중심 개념은 유라시아가 단일한 역사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P45 인류와 가장 가까운 것은 침팬지로이들은 DNA 뉴클레오티드 배열의 98.4퍼센트아미노산 배열의 99.6퍼센트를 우리와 공유한다 

P49 사실 영장류 사이에서 양족 보행은 드문 일로호미니드 외에는  어떤 동물도 일상에서 양족 보행을 하지 않는다 

P55  말은  완전히 녛대적인 호모사피엔스가 구형태의 인류와 함께 레반트 지역에서 최소 4 5000년간을 함께 살다가이후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구형태의 인류는 모두 멸종해 자취를 감추었다는 뜻이 된다 

P57 현대 인류의 조상은  20만년 전에(어쩌면 그보다 약간 이후에동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 진화했다이들이  10   무렵에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고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나와 서남아시아로 들어간 그곳에서 구형태 인류와 함께 살다가 서서히 그들을 대체했다그리고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이후  세계로 퍼져 나간 초기 인류의 집단  극히 일부에서 우리 모두가 나왔다는 사실이 바로 세계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설명한다 

P63 지구의 이런 기온 변동에 대해  유고슬라비아의 과학자 밀루틴 밀란코비치가 1920년대에  가지 이론을 제시한  있다 

P65  핵심 적응의  단계를 수행해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였으며이들은 영장목의 통상적 서식지(삼림 환경) 벗어나 대초원에서 살아가는 평지 거주 생물로 바뀌어 나갔다 

P69 초창기 호미니드의 유물  연대가 100  이상인 것들은 모두 동아프리카의 적도 35 이내에서 발견되고 있다 

P71 호모에렉투스의 핵심 이점은 하나  있었다예전의 호미니드에 비해 석기 기술이 훨씬 발전했다는 점이었다 

P76 음식을 손쉽게 구할  있다는 것은  채집자와 사냥꾼이 여유 시간을 넉넉히 갖고 그런 시간들을 문화 활동  사회 활동수면에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P77 일반적으로 수렵채집 집단은 균형이  잡힌 식단을 유지하고 건강 상태도 좋은 편이다 

P85 이들 수컷은 집단 안에서 잉여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처치를 당하더라도 무리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 

P89 오늘날 통설로 통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최초 정착 시점은 기원전 3 3000년이다 

P90 이들은 나름대로 20 유형에 이르는 각종 도구를 만들어 사냥과 채집을 했고이후 3  동안은  방식에 따라 삶을 이어 나갔으나 유럽인이 섬에 도래하고 나서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의 손에 전멸당했다 

P93 태평양을 누빈 폴리네시아인들의 항해였다.배를 타고  머나먼 섬에까지 이른 그들의 여정은 인류 역사에서 단연 눈에 띄는 대목으로(  식민까지  섬이 거의 350개에 이른다 어떤 지리학 지식도  어떤 철제 도구도  어떤 시간 계산법도  어떤 항해 도구도 없이 순전히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밤하늘의 별이 인도하는 방향만으로 이루어졌다 

P103 옛날에는 이 근본적 변화를 신석기 혁명이라 부르며, 토기의 발명 및 최초의 소규모 성읍 발달과 연관시키곤 했다 

P104 이들은 좀 더 정교하고 효과적인 동물 무리 관리전략을 택했고, 이로써 자신들이 죽이고자 하는 동물을 신중히 선별했다 

P111 예리코는 이제까지 발견된 농경 유적지 중 최초로 꼽히는 곳으로, 기원전 7500년 무렵에 가장 번성했다 

P114 모든 공동체는 저마다 복잡한 일련의 의례를 갖추고 있었고, 이를 통해 조상숭배와 특히 다산 의식에 참여했던 것 같다 

P119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돌무더기 쉰 개를 연구한 결과, 하나같이 달 주기의 최대 및 최소 경사각 지점과 정렬을 이루는 것으로 밝혀졌다 

P121 기원전 4800년 무렵부터는 양사오라는 좀 더 정교하고 새로운 문화가 북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와 비슷한 문화가 남부에서도 발달했다 

P128 기원전 1만 년 이후 약 7000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는 수많은 식물과 동물을 인간이 기르기 시작했고, 이로써 인류 대부분도 이동하는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촌락에서 정착 생활을 하며 작물을 키우고 동물 떼를 돌보기 시작했다 

P131 농경 채택이 불러온 가장 중요한 결과는 다양성의 상실이었다 

P133 전염성 질병은 개체 유지 및 증식을 거쳐 새로운 사람을 감염시키는데, 그럴 수 있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인구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P137 인류의 역사에서 이 과정은 최대 6회 일어났는데,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계속, 중국, 메소아메리카, 안데스산맥 중앙이 그 본거지였다 

P139 이 세 가지 문명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두 가지 주제, 즉 기술의 발전과 글쓰기의 진화에 대해 다룰 것이다 

P148 전쟁은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르크 시대(기원전 4000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원통형 인장에도 각종 전투를 비롯한 전쟁 포로를 찾아볼 수 있다 

P153 수메르는 결국 사르곤에게 정복당하는데, 그는 니푸르 북쪽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자리하던 아카드의 통치자였다 

P156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우르 제3왕조로 불리던 제국이 무너졌다 

P160 기원전 1900년 무렵에 수메르는 바빌론이 장악하게 되는데, 사실 이전만 해도 바빌론은 수메르 북부에 자리한 별 볼 일 없는 도시였다. 하지만 이 이후로는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늘 북쪽 지역이 맡게 되고, 수메르에 세워졌던 도시들은 쇠락하거나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P164 둘 모두 광범위한 사회적,정치적 강압, 즉 소규모 엘리트증이 인구 대다수를 착취하는 세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P166 이 왕조 이전 시대의 통상적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기원전 3050년에 히에라콘폴리스의 통치자 나르메르가 이집트를 통일해, 왕들이 다스리는 제1왕조가 성립되면서였다 

P178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비슷한 문제들을 겪은 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인더스 계곡은 이후로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P183 이 과정을 처음 발견한 곳이 정확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이번에도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지는 아나톨리아(오랜 기간 청동의 주요 생산지 역할을 꾸준히 해 온 곳이다)와 이란이다 

P187 바빌로니아에서 (기원전 2000년 직후에) 쐐기문자를 이용한 것이 최초의 실례이나, 쐐기문자는 원래 교착어인 무세르어를 표현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한다) 바빌론에서 사용되던 셈계 언어에는 이상적인 표현수단이 아니었다 

P198 사람이 직접 져 나르지 않는 한 물길 외에는 별다른 수송 방법이 없었고, 식량같은 기본 물품도 최단 거리 범위를 벗어나서는 수송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P199 기원전 1200년 무렵에는 멕시코만에 최초의 복잡한 사회 및 문화가 출현해 약 800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흔히 이를 올멕 문화라 하는데, 사실 올맥은 이 지역 거주민들의 스페인 정복 시절 명칭이다 

P206 도시 설계의 위치기 신중하게 선정되었음은 바닥 포장재나 바위의 노두에 새겨 넣은 일명 '점선형 십자 표시'가 도시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P208 확실한 사실은 기원후 750년 무렵에 테오티우아칸이 파괴를 당했다는 것뿐이며, 외부 침략의 증거가 전혀 없는 만큼 내부 원인에 의한 것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P211 마야 문명이 발견된 19세기 중엽 거의 직후부터 마야가 메소아메리카 달력을 상당수준 발전시켜 놓았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P212 이는 마야인들이 1년을 365.2550일로 계산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데, 오늘날 1년의 가장 정확한 계산수치인 365.2422일과 거의 차이가 없다 

P214 마야와 관련해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초기의 마야 통치자들과 테오티우아칸이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P227 민심에 어긋나는 통치자를 지명해 중앙의 지배를 강화하려는 노력도 소요와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문제들이 쌓인 결과 1519년에 스페인인들이 도착할 당시의 아즈텍 제국은, 이방인들에게 이용당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 되어 있었다 

P236 잉카에서는 죽은 왕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그것을 코리칸차 신전의 벽감에 진열했고, 이렇게 신전 안에 모셔진 왕의 시신은 그 무엇보다 신성한 후아카였다(잉카인들이 숨겨 둔 이런 시신을 스페인인들은 27년이나 걸려 가며 모조리 찾아 훼손했다) 

P242 이스터섬에서 섭취하는 식단은 단조로웠으나 영양은 풍부했고, 음식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화 활동에 넉넉히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P244 삼림 파괴가 섬의 토양에도 악영향을 미치면서 토양이 침식되고 작물 산출량도 감소했다 

P248 기록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인류의 압도적 대다수가 경험했던 것은 농부로서의 농사일 그리고 가난이었다 

P256 새로운 제국에서는 초기 통치자들이 서로 관련된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셋이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 새로 정복한 지역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군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다 

P260 그리스가(나중에는 이탈리아가)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서남아시아 세계에 통합된 것이 이런 문명 확산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동유럽과 러시아에서도 기원후 1000년 무렵을 전후해 수백 년 동안 이와 눈에 띄게 유사한 발전들이 있었다 

P261 인도의 국가들도 유럽의 그 어느 국가 못지않게 컸던 경우가 많으며, 인도 거의 전역에 지배력을 행사한 제국이 있었다는 사실(마우리아 왕조, 굽타 왕조, 무굴 제국)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P267 정착 사회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책은 성곽을 지어 유목민의 이동을 제지하고, 이따금 급습을 펼치거나 외교술로 내부분열을 조장해 유목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뿐이었다 

P268 중국인들은 나라의 국경선 둘레에 자리한 적수들을 자신들 힘으로 무찌르지 못하자 그들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샀던 것이다 

P277 함무라비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자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및 그와 연계된 무역로에서 지배적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약 600년 전 사르곤이 아카드 제국을 세웠던 이래,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제국이 세워진 것이다 

P278 이 석주가 실제 '법전'이었을 리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통치자들이 말년에 들면 자화자찬하며 자신들의 '위업'을 나열하곤 했던 일종의 송덕비였을 가능성이 크다 

P280 그 이후로는 '제2중간기'가 찾아와 약2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첫 번째 중간기 때와는 양상이 사뭇 달랐다. 이때는 내전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대신, 일명 '힉소스인'이라 알려진 외부 통치자들이 잇따라 이집트를 통치했다 

P298 그 모순이란 이집트가 역사상으로 수많은 신을 섬겨 오면서도, 늘 태양을 보며 하나로 통일된 신성한 힘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이다 

P309 하지만 이후 미케티의 새로운 통치자들이 크레타의 지방 필경사들에게 자신들의 언어에 맞게 선형 A 문자를 변형해 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P311 기원전 1000년대에 동부 지중해 세계에서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곳은 키프로스섬이었다 

P322 사실상 상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룬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왕이 다른 통치자들과 실질적으로 혹은 명목적으로 맺은 관계를 통해 일종의 느슨한 연합체를 구성했던 것뿐이었다 

P324 전 세계적으로 완벽한 독창성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문자는 현재 셋이 꼽히는데, 한자도 그 하나에 들어간다.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마야문자다 

P327 서남아시아 및 에게해에서 진행된 몰락은 사실, 기원후 400년 무렵에 있었던 이른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사건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원전 1200년 무렵의 약 40년 혹은 50년 동안, 지중해 동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도시와 궁정은 거의 모조리 파괴당했고, 이후 그중 상당수에는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지 못했다 

P338 유럽은 기원후 1500년까지도 이 같은 철 생산 공정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포르투갈인들을 경유한 끝에야 비로소 인도에서 발전시킨 철 관련 기술들을 들여올 수 있었다 

P342 도음을 정주로 옮긴 이후 기원전 771년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는 산동 지방 노나라의 역사서 이름을 따 춘추시대라 부른다.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221년에 진나라가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로, 이른바 전국시대로 알려져있다 

P349 기원전 240년대 들면서 진은 전문 행정가 상앙의 지휘하에 열국 최초로 새로운 형태의 전쟁, 조세, 행정 체제를 채택해 시행하게 된다 

P359 자이나교는 금욕적인 성격이 무척 강한 종교로서, 자연은 어느 것 하나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어떤 형태든 생명을 가진 것에는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강조했다 

P362 아시리아는 기원전 900년 무렵부터 기원전 610년까지 이 지역 일대 역사를 주름잡았으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중간지대를 전부 장악하고 이를 발판으로 주요 무역로를 차지한 최초의 제국이기도 했다 

P378 구약성경 속의 서사는 특정한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인 만큼 역사적인 가치는 별로 가지지 못한다 

P381 그리스의 자료들은 자신들의 세계였던 에게해 지역에만 주로 흥미를 보일 뿐인 데다 내용 자체가 크게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 이른바 '페르시아인'들을 비겁하고 무능하며 부가 넘치고 퇴폐적이며 여자들에게 통치받던 사람들로 그리기 때문이다 

P383 선과 악의 이분법을 탄생시킨 것을 비롯해 사상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서남아시아에는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종교가 거의 없었다 

P391 개인보다 국가가 상위였던 사람들에게는 스파르타의 이런 체제가 매력적으로 비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스파르타의 이런 방식을 동경했고, (다만 이들은 교육의 목표를 군사적 용맹보다는 좀 더 폭넓은 데 두기를 바랐다) 플라톤의 국가같은 경우 스파르타 체제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다름 없었다 

P395 아테네는 세계사의 몇 안 되는 노예제사회의 시초였다. 메소포타미아에 문명이 출현한 이래 서남아시아의 다른 사회에도 대부분 노예가 존재했지만, 이들 사회의 노예는 그 총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경제 및 사회의 작동에도 핵심적이지 않았다 

P404 에트루리아는 열두 개의 도시 연맹으로 구성되었던 듯하며, (개별 도시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연맹 안에는 공동의 사원과 함께 '라스나인 행정체계'같은 공공의 제도가 일부 마련되어 있었다 

P413 통일과 함께 중국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중앙아시아까지 진입하니, 이것이 종국에는 이란의 파르티아 제국, 그보다 소규모였던 박트리아의 쿠샨 왕조, 그리고 인도 북서부와 교류할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이다 

P417 유목민은 정착 국가에 대한 착취 없이는 제국을 창건할 수가 없어서, 흉노족도 중국에 한나라가 들어서고 그곳을 대규모로 착취하게 된 뒤에야 제국 창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P419 한 제국이 이들 오랑캐에 매년 지원해 주어야 했던 물자는 중국이 거두어들이는 전체 조세의 약 10분의 1에 달했다 

P429 로마인들은 전장에서도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폭력적이었고, 관용 또한 베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P435 당시 노예제는 현상 유지를 하는 데만 1년에 최소 25만 명 이상의 새로운 노예가 필요했으므로, (이 수치를 아메리카와 비교해 보면, 아메리카의 경우 19세기 말의 절정기 때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팔려 간 노예의 수가 약 8만 명이었다) 전쟁으로는 이탈리아의 노예 인구가 충분히 충당되지 않았다 

P448 유라시아 양 끝을 오간 모든 무역이 그랬듯, 이 비단길 무역에서도 문제는 중국과 인도가 원하는 물품을 서쪽에서는 거의 혹은 전혀 생산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비단길에서의 수익은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가는 교역에서만 났다 

P453 하지만 사실상 이 무역은 유라시아의 좀 더 빈곤한 지역이 엘리트층이 갈구하는 갖가지 물품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유일한 자신인 귀금속을 가지고 부유한 사회로부터 그것들을 사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P467 무역업자 및 순례자들이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시켰다는 것은 곧 이들이 아직 한 번도 노출된 적 없던 질병까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P471 중국의 북부가 304년에서 439년까지 맞은 시기는 일명 '5호 16국' 시대로 일컬어지는데, 이 지역의 정치적 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단적으로 말해 준다 

P477 불교의 확산은 동시대의 로마 제국 내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확산보다 훨씬 광범위했으며, 이제까지 유라시아 내부의 그 어떤 문화적 교류보다도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P480 기원후 366년에 비단길의 한 지점인 돈황 근방에 1000기의 부처상으로 석굴이 조성된 것이 천불동의 최초 사례였으며, 이를 필두로 중국 북부 및 사천 지방 전역에 석굴 양식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P486 대체로 이제까지의 세계사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장 오래된 논쟁과 전쟁, 박해는 모두 이 계통의 종교안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510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분열된 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5년에 제국을 둘로 나누어 서쪽은 작은아들 호노리우스에게, 동쪽은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물려주면서였다 

P521 동로마 제국이 겪었던 주된 문제는 (유스티니아누스와 그 후대 황제들 치세에 특히) 동서에서 양편에서 양면전을 치러야 했다는 것이었다 

P530 서남아시아와 이란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혼합 문명이 출현했다 

P534 메디나에 머물면서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설파하는데, 살라트(기도), 자카트(자선), 하지(순례), 샤하다(신앙고백의 의무) 및 라마단 단식일의 준수가 그것이다 

P541 이슬람교의 개종은 오히려 사회적 지위와 관련해 골치 아픈 문제를 야기할 뿐 아니라, 정부의 조세수입을 감소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다 

P548 사람들은 비잔티움 국가의 역사를 곧잘 쇠망의 역사로 인식하지만, 사실 이 나라는 재건되고 나서 무려 800년이나 명맥을 이어 갔다 

P551 성상 파괴 운동은 726년에 레오 3세의 공식 인가를 받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30년에는 종교적인 형상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칙령이 도시에 내려졌다 

P560 당나라에서 농민이 내야 했던 세금은 총 세 가지로, 곡물로 내야 했던 세금을 조, 국가에 대해 짊어진 노역의 의무를 용, 비단과 마와 같은 토산물로 내야 했던 세금을 조라고 했다 

P561 무후는 황제에 즉위하자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고 엘리트층을 대거 숙청하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지만, 무후의 지원을 받는 불교 단체는 그녀의 이런 조치에 대폭 지지를 보냈다. 무후는 생전에 끝까지 권력을 지켜 나갔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705년에야 중국은 당 왕조로 복귀했다 

P568 중국, 돌궐, 토번, 아랍의 네 거대 제국 사이에 경쟁이 시작된 것은 8세기 초반이었다 

P573 794년까지는 나라가 일본의 수도로 기능하다가 이후 헤이안이 새로 건설되는데, 이곳 역시 장안을 본 떠 격자식으로 설계되었으나 성곽은 찾아볼 수 없었다. 헤이안은 약간의 부지 변경을 거쳐 교토로 태어난, 이곳은 1868년까지 일본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일본 역사에서 내내 핵심 도시의 자리를 지켰다 

P575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 양편 모두에서 파급되는 영향력에 매우 개방적이었다 

P581 프랑크족은 클로비스의 치세에 갈리아를 상당 부분을 장악했지만, 그가 511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왕국 하나를 아들 넷이 나눠 갖게 되었다 

P592 시아파는 사제의 혈통을 좁은 범위에 한정해, 무함마드 가계에서 칼리파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알리의 두 아들뿐이라고 주장했다 

P600 당 제국은 751년의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연달아 심각한 문제들을 맞았다 

P608 10세기의 역사는 대체로 이들 지방 가문들의 분쟁, 결혼 동맹, 그리고 왕실 가문 잔존 세력과의 결탁이 주를 이룬다 

P609 이런 지역의 주민들이 왜 광범위한 지역을 약탈하고 다녔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역사에는 793년에 섬에 자리한 린디스판 수도원을 약탈한 것이 이들의 첫 침략으로 기록되어 있다 

P619 이 시절의 기근은 그야말로 식량의 절대 부족을 뜻했다. 일례로 1315~1317년 사이에 서율럽 전역이 연이은 흉작으로 고생을 했으며, 1316년 8월에는 국왕인 에드워드 2세조차도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할 정도였다 

P631 이슬람 세계가 직접 파견한 사절이 중국에 처음 이른 것은 660년으로, 이후 몇십 년 만에 중국 남부의 대부분 항구에는 이슬람 무역업자의 대규모 공동체가 자리 잡았다 

P637 교회 권위자들이 여러 면에서 반대했음에도 유럽에서도 대출이 찾았는데, 거기에는 큰 위험들이 뒤따르곤 했다. 일례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1341년에 대출금 상환을 막무가내로 거부했고, 그 결과 5년도 안되어 피렌체의 페루치 가문과 바르디 가문이 차례로 파산당했다 

P641 천문학에서 훨씬 의미 깊은 관측은 신성 및 초신성을 발견한 내용으로(오늘날까지도 천문학자들의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기원전 1400년에 최초의 사례가 관측된 것을 비롯해 계성운을 탄생시킨 기원후 1054년의 초신성 폭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이 같은 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로지 중국과 일본의 기록 덕분이 확인할 수 있다) 

P651 유럽이 그리스의 과학, 아리스토텔레스, 수많은 중대 기술들을 비롯해(사실은 인도 숫자지만) '아라비아 숫자', 0의 개념, 복식부기,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상업 신용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다 이슬람을 통해서였다 

P661 금속활자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곳은 한반도로, 1403년에 주자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활자주조가 이루어졌다 

P669 송이 군사적으로 왜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그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 송이 기술적 우위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데 있다. 송이 보유하고 있던 신무기에 대한 지식은 순식간에 국경 너머로 흘러나갔고, 중국 주변의 강대국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무기를 제작했다 

P683 남쪽의 거대 도시 항주는 1100년의 인구가 개봉에 약간 못 미쳤고,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 나갔다 

P685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마광이 저술한 자치통감(다스리는 일에 도움이 되는 폭넓은 거울이라는 뜻이다)으로, 기원전 403년에서 기원후 959년까지의 중국역사를 다루되 저술에 사용된 사료를 30장에 걸쳐 비판적으로 검증한 것이 특징이다 

P693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은 동서 무역로의 중간에 자리했던 까닭에,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물론 인도나 이슬람 등의 외세의 영향력에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P711 전반적으로   인도의 술탄 통치기는 인도의 위대한 번영기에 해당했다 시기에 인도는 동서의 유라시아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교역 도시들이 크게 번성했을  아니라농업은 고도의 생산성을 보였고국내 무역도 대폭 증가했다 

P718 북아프리카의 무역업자들이 사하라 사막을 건넜던 것과 달리동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이슬람 무역업자들은 그렇게 내륙 깊숙이까지 진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P722 1000 이후의 3세기는 유럽의 세력 확장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였다. 1300년에 이르자 유럽의 인구는   이상으로 불어나 8000 명에 이르렀으며곳곳에 농경 정착촌들이 새롭게 자리 잡으면서 경작 지대도 엄청난 규모로 늘어났다 

P731 694년에는 톨레도 공의회를 통해 서고트 왕국이 모든 유대인을 노예의 지우로 격하해 피레네산맥 이남 지역에만 머물게 했다 

P733 교회에서는 종교재판을 만들어 개인의 신앙을 속속들이 파헤쳤고이러한 심문은 비단 카타리파뿐만이 아니라 유대교도  신앙심을 잃은 개종자들그리고 교회의 뜻을 따르지 않는 기타 여러 세력에도 마찬가지로 활용되었다이단으로 판명  자들은 속세의 권력자들에게 넘겨져 처벌을 받았다 

P736 962 교황이 직접 오토의 대관식을 열어주었다카롤루스 대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관식 역시 교황과 황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P748 셀주크족이 다시 위세를 회복함으로써 비잔티움은 1176년의 마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돌이킬  없는 대패를 당했고 결과는 100 전의 만지케르트 전투에 거의 맞먹을 만큼 처참했다 

P755 툴루이는 호라산을 정복하는 한편칭기즈 칸은 메르브 성읍을 점령한   주민의 목숨을 앗았는데,( 10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몽골족의 지배에 반대헤 니샤푸르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P757 카라코룸 근방의 오르홍강가에서 열린 이회의에서 몽골족은 한반도를 정복하기로 결정하는 한편,(한반도에서는 이미 1231년부터 몽골족의 군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길로 서진해 루스족의 제후국은 물론 남송까지도 손에 넣기로 했다 

P786 하지만 그렇게  회복기에 접어들려는 찰나유라시아의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럽에도 대규모의 전염병이 돌게 된다이른바 흑사병이 유럽을 덮친 것이다 

P788 폐렴성 페스트는 콧물이나 재채기를 통해 직접적으로 접촏해야 감염되었는데그럴 때는 치사율의 거의 100퍼센트에 달했다하지만 감염된 생주의 벼룩이 매개일 때는 감염이 된다고 해도 목숨을 잃는 사람이 세명   명이   되었던  같다 

P792 이런 상황에서도  왕조는 실로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 냈는데이런 사실만 봐도 중국의 인프라가 혼란 속에서도 얼마나 견고하게 버티었는지나아가 중국 통치 체계각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를 실감할  있다 

P797 동아프리카 연안에서 발견되는 중국의 동전 꾸러미들은 최초의 것이 연대가 620년가지 거슬러 올라가며탄자니아 연안을 따라서는 엄청난 양의 10세기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P800 북경으로의 천도가 가능했던 것은 몽골족 치세에 복원되고 북경까지 확장되었던 대운하가 이즈음 추가 정비를 마친 덕분이었다 

P810 11세기부터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선박을 만들어 한반도  중국과 교역하기 시작했으며, 1404년에는 아시카가 막부의 3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명나라와 공식적인 조공 관계를 맺은 것을 계기로 공식 조약에 따라 무역 규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이들 교역을 통해 일본은 중국에 구리유황목재를 비롯해 특수하게 제작한 칼을 팔았다.(1480년대 무렵에는 칼의   수출량이 3 7000자루에 이르렀다) 

P815 티무르는 위대한 유목민 정복자로서 유라시아의 정착 사회에 영향을 기친 마지막 인물이었다 

P826 오스만의 공격부대는 뛰어난 성능의 대포도 구비하고 있었으니 무기 앞에서는 지난 1000년간 난공불락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곽도 무방비였다 

P836 교황들이 로마를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에 들어 교황청은 점차 정교해지고부가 늘어나고,(물론 종교를 정면에는 내세워 진의는 감추었지만  적극적으로 정치술을 구사하게 되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P838 이 시기에 동유럽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는커녕오히려 헝가리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왕국이 출현해 대규모로 영토를 장악해 가는 모습이었다 

P841 헝가리는  무렵에 한참 힘이 커져 가던 오스만에도 대응하지 않으면  되었는데결국 헝가리 왕조를 패망시킨 것이 바로  오스만이었다 

P846 교회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이 함락된 이후 특히자신들과 비잔티움의 관련성을 적극 강조했다그래서 급기야는 모스크바가 3 로마라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P846 포르투갈인들의 항해는 1294년에 포르투갈에서 이른바 레콩키스타가 완료되고 나서 처음 이루어졌지만, 1395년에 주앙 1세가 왕위 올라 새로운 군주제가 성립된 것이 본격적으로 항해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P850 설탕 생산에 들어가는  막대한 노동력을 어떻게 동원할지가 문제였다당시 유럽인들은 농장의 감독관 이상의 힘든 일은 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다름 아닌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는 것이었다 

P853  세계의 본질적 특성은 다름 아닌 토착 원주민의 정복과 제거아프리카로부터의 노예무역상업적 플랜테이션을 통한 유럽에의 물품공급이었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체계가 이후의  세기에 걸쳐 규모만 어마어마하게 커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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