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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0_독후감

[2020-25]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by 반란을_꿈꾸며 2020. 5. 22.

제목 :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작가 : 메리 매콜리프

번역 : 최애리

출판사 : 현암사

읽은날 : 2020/05/11 - 2020/05/21

분류 : 일반

 

1871년부터 1920년대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예술사를 기록한 책이다..

3부작이고, 이 책은 1871년부터 1900년까지를 다룬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정말 많이 나온다. 

특히, 인상파 작가들이 어렵게 자신들의 예술영역을 만들어가는 장면이 책 이곳저곳에 있어서 예술이라는 게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1년단위로 장이 만들어져 있어서 각 장마다 미술, 조각, 건축, 연극 등이 섞여 있어 처음에 책에 적응하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각 사람마다 표를 만들며 읽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다음번에 읽을때는 표를 좀 그려봐야겠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이 나온다.

에밀 졸라를 프랑스의 양심으로 만들고, 프랑스의 위선을 온 천한에 드러낸 유명한 사건...

사람들이 알고있는지 모르겠는데 드레퓌스 사건은 무죄판결이 난 것이 아니라 사면으로 끝난다. 

무죄판결을 내리면 프랑스의 군인들과 애국주의자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내린 정치적 결정이다. 

프랑스를 비웃고 싶지만 오늘도 내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어르신들의 열정적인 글들을 보면 우리나라라고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 책의 최대 단점은 사진이 없다는 점. 

500페이지가 넘고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등장하는데 사진이 하나도 없어 따로 구글에서 찾아봐야 한다. 저작권 때문인가?

좀 아쉽다..  

 

P23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센 지사였던 오스만 남작은 파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자 ㅇ가난에 찌든 지역을 마구 철거했고, 그러는 과정에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 미제라블의 배경-사실상 배경도 주요 인물이나 다름없었는데-이 되었던 도시의 구역들 전체를 밀어버렸다 

P28 르누아르의 해명을 무시한 채 그들은 그를 6구의 구청으로 데려가 총살하려 했다 

P40 그(빅토르 위고)는 어디서든 눈에 뜨이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달랬고(그의 여성 편력은 점점 더 악명이 높아졌다), 그 전해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기록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P49 이 일에서 에펠은 여러 가지 재능을 드러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한 가지는 건자재로서의 강철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설계와 건축 방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었다 

P59 1866년 살롱전에 모네의 바다 풍경 두 점이 입선한 것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는 에두아르 마네에게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P73 이는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위해 선택된 부지가 정부군과 몽마르트르 민중 간 최초의 대치가 일어났던, 사실상 코뮌이 태어난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P85 사람들이 아직 이해못하는 건데, 문제는 풍경이나 바다나 인물을 그리는 게 아니라, 한 시대가 풍경이나 바다나 인물에 미친 영향을 그리는 걸세 

P112 빅토르 위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뮌 동조자로 호가 나 있던 기자 앙리 로슈포르는 유형지로 이송되었고, 그의 운명은 막마옹이 권좌에 오르면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P144 그런 상징적 행동들에 더하여 공화파는 자신들의 정치적 다수를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조처를 취했으니, 상원 의원의 종신제를 폐지하고, 왕위를 노리는 인물들을 추방하고, 언론과 술집들(공화파가 종종 정치적 회합을 갖던 장소였다)에 대한 탄압을 풀었다 

P163 그녀는 자격 여하를 불문하고 영감을 주는 선생이었음이 틀림없다. 드뷔시 또한 분명 그렇게 생각했고 훗날까지도 후한 점수를 주었다 

P165 먼 훗날 그 땅에는 정부 청사들이 들어서게 될 테고, 그것들은 또 때가 되면   브랑리 박물관에 자리를 내주게 될 테지만로댕의 시절 그것은 대리석 덩어리들이 쌓여 있는 잡초 무성한 빈터였다 

P170 뒤랑-뤼엘도 큰 힘이 되었지만, 1880년 무렵 마네의 주된 후원자는 감식안을 갖춘 오페라 가수 장-바티스트 포레로마네는 그의 초상화를 1877년 살롱전에 냈다. 마네가 죽었을 때, 포레는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1866년 살롱전 낙선작), <기찻길> 등 마네의 작품 예순일곱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P186 대대적인 행사였고, 위고는-그는 평생 지나치게 겸양한 적이 없었으니- 행사의 취지에 부응하여, 자신이 구현해온 상징적 존재로서 찬미자들의 끊이지 않는 행렬을 주재했다 

P198 드가는 이 세계에 매혹되어 많은 스케치와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 세계에 대해 눈곱만큼도 낭만적이지 않았으니, 그가 그린 발레리나들은 불거진 근육에 지치고 권태로운 모습으로 보인다 

P210 그녀의 남편 외젠 바니에는 성공한 건설업자로 극도로 너그러웠거나 아니면 극도로 둔감했던 듯하다. 드뷔시가 자기 아내에게 구애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젊은 음악가에게 사뭇 부성적인 우정을 베풀었으니 말이다 

P215 대중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시의회는 경기장 유적을 헐어버리는 데 동의했고, 한술 더 떠 그 자리에 버스 정거장 설치를 허가하기가지 했다 

P227 베르나르가 분명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다말라가 그녀를 무시하는 체하며 다른 연인들과 그녀를 약 올리는 등 그녀 자신의 오랜 수법을 기막히게 구사하리라는 것이었다 

P256 그는 상원 의원에 당선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고 세계적인 문학적,정치적 명성을 얻는 등 영예의 절정을 구가하는 한편, 자식 셋이 먼저 죽고 네 번째 자식은 정신이상이 되어버리는 비극을 겪었다. 사회에 대한 기여로 거의 신격화되어 떠받들리는가 하면, 여성 편력으로 끊임없는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P278 작품과 그에 대한 졸라의 방어는 사실상 그의 모든 화가 친구들을 분노케 했으며, 그중에는 드가(천성적으로 남을 얕보는)와 모네뿐 아니라 르누아르와 피사로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는 물론 세잔이었다. 증정본을 받은 그는 정중하지만 통렬한 답장을 보내고는, 친구와 일체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P307 예술사가 존 리월드는 "애정에 관해 항상 독점욕이 강했던 빈센트로서는 테오가 자신만의 가족을 갖게 되면 그의 관심이 다소나마 덜해질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라고 지적했다. 

P311 이듬해 그의 당은 거의 사라졌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장군 자신이 야심의 급작스러운 좌절과 사랑하던 정부의 죽음에 망연자실하여 그녀의 무덤 곁에서 자살했다 

P313 에펠은 탑을 완성한 첫해에 비용을 회수했고, 그 후의 이익-입장료와 탑의 레스토랑 및 에펠탑 모형판대 등 기타 상업적 사업들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아주 부자가 되었다 

P319 모네와 그의 좋은 친구 클레망소 덕분에 올랭피아는 이제 다른 인상파 걸작들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다 

P343 그녀는 물리학 고급 학위를 얻기 위해 소르본이학부에 등록했다. 그러고는 공부에만 전념한 채 좌안의 다락방들을 전전하며 추위와 굶주림과 싸웠다.  

P359 "아무리 노력해봐도 내 삶의 서글픔을 신랄하고 초연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주인공"처럼 

P375 프루스트는 분명 속물에 아마추어이고 한량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걸작에 흠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득이 되었다 

P376 무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갱은 껄끄러운 손님으로, 그의 술주정은 악명높았고 자기 중심적인 태도도 도가 지나쳤다. 하여간 그림을 그리겠다며 아내아 다섯 자녀를-별다른 고뇌 없이- 내팽개친 사람이었으니까. 

P379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겪었던 대로, 자기 식으로 해나간다는 것은 대중의 성원을 받기 어려운 일이었고, 부르델은 가난하게 살았다 

P384 레지옹의 조사는 호의적으로마무리 지어졌으나, 에펠로서는 신물이 날대로 난 터였다. 그는 자기 회사에서 사직하고, 회사 이름에서 자기 이름도 빼버렸다. 귀스타브 에펠은 어떤 공사에도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P389 무죄한 사람들을 죽이려 한 데 대해 꾸짖는 파사에게 그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부르주아치고 무죄한 자가 없소" 

P398 동시대 화가들 중에서는 모네만이 세잔의 칭찬을 얻는 영광을 누렸다. "모네! 나는 그를 루브르에 걸겠네"라고 그는 외치곤 했다. 다른 사람들, 특히 고갱에 대해서는 경멸감밖에 없었다.  

P404 그 자신이 '아르누보'라는 용어를 거부했음에도("예술은 영원하다, 새로울 수가 없다"라고 그는 말했다) 무하는 곧 그 대표자가 되어, 많은 파리 사람들은 아르누보를 그저 '무하스타일'이라 부르게끔 되었다 

P420 피에르 루이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드뷔시는 여전히 자신이 "20세기의 우리 손자들이나 이해할 것들을 만들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P449 이 의무라는 것에 따르면그저 프랑스 인구를 늘리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누군가와 결혼 해야 한다는 건가만일 그렇다면실로 가혹한 요구이다 

P470파리 사람들뿐 아니라  세계가  진기한 쇼를 지켜보았으며프랑스에서 가장 국제적 명성을 지닌 작가가 자기 나라 군대를 생각지도 못할 범죄로 고발하는  극적인 사건을 언론은 게걸스레 보도했다. 

P474 졸라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배심원단을 향해 "조국이  이상 기만과 부정의 길을 가지 않기를 원합니다저는 여기서 유죄를 선고받을지도 모르지만언젠가 프랑스는 명예를 구하도록 도운  대해 제게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P485 많은 관람객 가운데 일부는 -얼마 전에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오스카 와일드도 그중  사람이었다그것이 얼마나 걸작인가를 알아보았지만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P490 장차 사티가 젊은 작곡가들의 선구자요 지도자로 추앙받게 되는 것은 이런 길거리 음악에 대한 개방성 때문이다 

P507 여전히 정확한 진실은 아니었지만어차피 에스테라지의 고백은 파기원의 결정에 비추어 거의 중요치 않은 요소였다 순간을 위해 그토록 오래 싸워온 사람들클레망소와 조레스그리고 물론 마티와 드레퓌스는 서로 얼싸안고 울었으며소식을 들은 뤼스 드레퓌스 역시 그랬다 

P517 클레망소와 동료 공화파가 보기에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교회의 노력때문에 비화된 것이었다드레퓌스 사건이 지나간 지금공화국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보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P539 모네는 1926 12 5 죽었고클레망소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나중에 장례식에서 그는 "모네에게 검정은 어울리지 않아"라며관을 덮은 검은 깃발 대신 꽃무니 천을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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