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2022_독후감

[2022-09] 서양사 강좌

by 반란을_꿈꾸며 2022. 2. 22.

 : 서양사 강좌

 : 박윤덕

 : 아카넷

 : 2022/01/30 - 2022/02/20

 

대학생등 일반인들의 교양을 위한 서적인것 같다.

서양사를 특별한 감정이입없이 역사적 사실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책 두께도 만만치 않아 읽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교과서 읽는 느낌이라 재미는 없었지만 통사로 읽어나가기에는 참 좋았다. 

어려서 미국, 서양의 것은 모든게 좋은 것이고 본받아야 할 문화라고 배워서인지, 서양의 문화는 나에겐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고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여행도 자꾸 유럽만 가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거칠게, 그리고 나쁘게 말하면 서양의 역사라는 게 과거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수입한 문화로 짜깁기했고, 근대 이후에는 아프리카와 동양의 피와 황금을 착취해서 쌓은 것이다

알면 알수록 서양의 잔인함에 몸서리쳐지게 된다.

그래도 그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부럽다.

유럽을 볼 때 느끼는 이중적 시각은 책을 읽을때도 똑같다. 

 

 

 

1% 고대 그리스 세계의 역사는 크게 나누어 크레타 문명(기원전 2500년경-1400년경), 미케네문명(기원전2000년경-1100년경), 암흑기(기원전 1100년경-800년경), 상고기(기원전 8세기-479년), 고전기(기원전 479년-338년), 헬레니즘 시대(기원전323년-30년)로 구분된다

2%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들은 초기에 귀족정 체제를 유지했다. 귀족정은 전통적인 혈연귀족들의 권위와 그들의 토지재산에 바탕을 둔 소수의 지배체제다

4%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 이오니아 지방의 자연철학은 신화적 사유가 아닌 합리적 추론을 통해 자연계의 이치를 파악하고자 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관점을 내포한 것이었다

6% 로마 민회의 특징은 오직 하나의 민회만 있던 아테네와 달리 네 개의 민회(쿠리아 민회, 켄투리아 민회, 트리부스 인민회, 트리부스 평민회)가 있어서 각기 자신이 속한 쿠리아, 켄투리아, 트리수브별로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각 투표 단위안에서는 과반수 원칙이 적용되었지만, 전체 민회의 최종 결정은 각 투표 단위(30쿠리아, 193켄투리아, 35트리부스)가 각각 한 표를 행사하는 단위투표제였다

6% 그라쿠스 형제 개혁에서 드러났듯 원로원과 귀족들은 중소 자영농의 몰락과 도시로 집중한 무산시민들의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혁운동을 저지하다가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 사병화된 군대를 배경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군인정치가들은 내전을 전개해서 국력을 약화시키고, 카이사르의 독재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7% 디오크레티아누스는 권력 투쟁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293년에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고 2인의 정황재(아우구스투스) 밑에 각기 한 사람의 부황제(카이사르)를 임명해서 4인의 황제들이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4제 통치를 도입했다

8%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해서 1세기의 황제들은 로마나 이탈리아 출신이었지만, 2세기에 오면 히스파니아 출신, 3세기가 되면 아프리카와 발칸반도 출신이 황제가 되어 로마를 통치하기도 했다. 노예와 자유인, 시민과 비시민의 구별이 있었지만 재능과 능력에 다라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로마사회의 역동성의 배경에는 인간주의가 가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0%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박해는 중앙 정부가 아니라 지방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0% 트라야누스는 “기독교 신자들을 사형시킨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수색해서 찾지는 말 것이며, 주민들이 고발한 경우에만 재판해서 처형하라. 이때 익명으로 제기된 고발은 무시할 것이며 고발당한 기독교인이 뉘우친다면 용서하라”라고 대답했다. 트라야누스의 이 대답은 이후 데키우스의 대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다루는 기본 원칙이 되었다

11% 3세기 중엽 초기 기독교의 최고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신약성경에 포함되는 문서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모든 교회가 동의하고 있는 문서인데 여기에는 사복음서, 사도행전, 13개의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1서, 요한 계시록이 들어가 있다. 둘째는 성경에 포함해야 할지 의심을 받고 있는 문서들인데 베드로후서, 요한2, 3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가 있다. 셋째는 배격되어야 할 문서인데 애굽 복음서, 도마 복음서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12% 4세기 말과 5세기에 로마 제국 변방의 이민족들은 미개한 야만족이 아니라, 로마 제국을 비롯한 여러 주변 문명들의 영향을 받으며 이미 충분히 독자적인 문명으로 발전하고 있던 집단이었다

12% 최종적으로 왕국의 건설에 성공한 게르만 부족으로는 앵글로색슨족, 부르군트족,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 정도를 들 수 있다. 게르만이 건설한 왕국들은 고ㅜㄴ사적 지배자인 게르만 전사들과 문화적으로 우월한 제국 내 거주민들이 타협해서 결성한 이질적인 공동체였다

13%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후대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로마법이다. 그는 로마의 영광을 회복하고 국각행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로마법을 정비했다

14% 교황은 800년 성탄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미사에 참여한 카를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함으로써 서유럽 지역에 새로운 황제를 출현시켰다. 카룰루스가 사전에 그 대관식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다소 논란이 있지만, 주목할 부분은 그 대관식을 주도한 것이 로마 교황이었으며, 로마인들의 전폭적인 환호 속에 그 의식이 거행됐다는 사실이다.

24% 대학과 아울러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중세 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미술 분야, 특히 교회와 수도원 등의 종교적 건축이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리 위고의 표현처럼 중세인들은 그들의 사상을 뜰에 기록했다. 교회 건축은 아마도 중세에 최대의 자금과 인력이 동원되고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사업이었을 것이다

25% 십자군은 원래 이슬람에 대한 종교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지중해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29% 잔 다르크는 전리품을 위해 싸우는 기사나 용병들과는 달리 프랑스와 국왕을 위해 싸웠다. 즉 공공의 선을 위해서 싸운 것이다. 이러한 공의 개념은 로마 제국 이후 거의 찾아볼 수 없던 것이었다. 중세 봉건사회가 사적 관계에 근거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공공성의 등장은 중세의 봉건적 관계가 근대적 관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0% 모스크바의 통일군주 이반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하고 비잔티움 황실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 문장을 넘겨받고 비잔티움의 관습을 도입했다. 이리하여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가 되었다

30%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인들을 장거리 여행에 지속적으로 나서도록 추동할 만한 지적 호기심이나 물질적 유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32% 인도양은 중세 이래 수백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교역의 중심 무대였으며 엄청난 부의 근원지였다. 유럽인들이 중히 여기는 후추와 각종 향신료도 이런 아시아 상업 네트워크의 중개를 통해서 인도양을 횡단하고 페르시아 만이나 홍해 루트를 지나 레반트 지역에 전해진 다음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서 유럽에 들어온 것이었다

33% 1520년 이후 약 30년 동안은 직업적 정복자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정복 사업에서 국왕이나 국가는 형식상의 주체에 불과했고, 실제 정복은 사적인 인간의 집단들에 의해 그들 자신들의 비용으로 수행되었다

33%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유럽이 1500년 이후 비유럽의 부를 엄청난 규모로 약탈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에 이를 때까지 유럽은 아시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시아가 부와 권력의 면에서 아주 늦게까지 세계 중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34% 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가 역사적, 문헌학적 지식을 동원해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이 중세 교회에서 주장한 것처럼 4세기가 아니라 8세기에 와서야 만들어진 위조문서임을 밝혀낸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39% 앙리 4세의 치세로부터 루이 14세에 이르는 1715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의 위대한 세기는 이렇게 첫걸음을 내딛었다

43% 근대 초에 과학혁명으로 신앙에 대한 이성의 승리가 확인된 듯 보였지만, 그 시대는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광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46% 인권선언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선언했지만, 당대에 그것이 갖는 의미는 명백히 계급적이었다. 인권선언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선포했지만(3조), 실상 그 국민은 재산 자격에 의해 선거권을 행사하는 능동시민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재산을 소유한 시민의 혁명, 즉 부르주아 혁명으로 지칭했다

55% 1856년 3월 말 체결한 파리조약에 따라 흑해 지역에서 군함 설치와 군함의 항해가 금지되어 러시아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61% 1852년 탄생한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센 지사에 임명한 오스만이 1870년 제2제국의 몰락까지 수행한 파리의 대대적인 변모는 근대적 도시정비의 전형이었다

77%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전이요 세계 전쟁이었다는 시,공간적 특징 외에도 역사상 유례없는 총력전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민족주의의 시대에 전 국민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의 전쟁에 쏟아 부은, 전선과 후방의 구별이 없는 총력전이었다

81% 전쟁을 막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으나 오히려 전쟁 도발을 부추겼고 그 과정에서 약소국을 희생시킨 것은 뮌헨 협정의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나 불가침조약의 소련이나 마찬가지였다

82%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인 반전은 사실상 동부전선에서 벌어졌다. 1942년 늦여름부터 여러 달째 계속된 독일과 소련 사이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결국 1943년 2월, 독일군의 항복으로 끝났다. 이어서 7월에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승리한 소련군은 이후 계속해서 독일군을 서쪽으로 도로 밀어냈다. 많은 역사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나라가 소련이었다고 평가한다

84% 불가리아는 독일의 이송 압력을 끝내 물리쳤고 이로써 5만 명의 불가리아 유대인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헝가리와 달리 자생적 파시스트 운동이 미약했다는 점, 동유럽 대부분 지역과 달리 반유대주의 전통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왕과 의회, 정치인, 성직자 및 주민 상당수가 유대인 이송에 적극 반대했다는 점이 작용했다

87% 네루(인도),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저우런라이(중화인민공화국), 나세르(이집트) 등을 비롯해 29개국 정상들이 참가한 반둥회의는 수카르노의 표현대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두 대륙에 걸친 유색인종의 회의”였다.

89% 1968년은 혁명적인 물결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알았던 해였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물론 일본과 동구에서도 시위, 점거, 농성, 진압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분도, 동양과 서양의 구분도 없었다. 그야말로, 윌러스틴에 따르면, 1848년에 이은 두 번째 세계혁명이었다.

90% 이에 염증을 느낀 신세대는 성해방, 로큰롤, 청바지, 미니스커트, 마약을 즐기는 등 ‘금지를 금지한다’라는 구호를 외차며 이전 세대가 금기한 사항들로부터 이탈을 꿈꾸었다

91%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에서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자원입대했던 아버지 세대와 달리, 이들은 ‘이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징집에 반대했다

92% 여성운동, 평화운동, 반핵운동, 생태운동은 68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일상에 뿌리를 내렸다

'독후감 > 2022_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11] 이탈리아 아트트립  (0) 2022.02.24
[2022-10] 이불속 클래식 콘서트  (0) 2022.02.23
[2022-08] 한국사를 보다 2  (0) 2022.02.11
[2022-07] 밤의 숨소리  (0) 2022.02.03
[2022-06] 세계사 추리반  (0) 202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