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백제여행
작가 : 황헌
출판사 : 책읽는 고양이
읽은날 : 2022/07/18 - 2022/07/31
재미있는 답사책이 나와서 요즘 읽고 있다.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이번에는 백제다.
백제라고 하면 공주와 부여만 생각하는데 사실 한성백제 시절이 제일 길다.
온조왕부터 시작해서 개로왕까지 있었으니 백제시대의 대부분은 한성시절이다.
그렇지만 한성백제는 유물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대부분 아파트 밑에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몽촌토성 등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여행이다 보니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고분군등을 먼저 답사한다.
이후 공주를 방문하고, 부여를 방문하고, 이후에 익산도 방문한다.
아무래도 익산은 무왕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멋드러진 탑도 있으니 백제여행이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니는 것도 이 책의 특이한 점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백제답사에서 불편한 교통수단에 대한 투정도 책에서 튀어나온다.
사진이 좀 부족한 것이 흠이지만 나름 재미있는 답사책이다.
아직 백제유물을 보러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보니 더 흥미가 갔다.
재미있다.
p5 그 실체적 모습을 반드시 전문가라야만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제 수도가 있었던 곳을 따라 서울에 위치한 한성백제박물관, 공주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 부여에 위치한 국립부여박물관, 익산에 위치한 국립익산박물관, 그리고 각 지역에 산재된 유적지를 쭉 방문하다보면 누구나 쉽게 백제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p9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드디어 낙랑군을 한반도 밖으로 쫓아내면서 그 명성은 사라진다. 그런데 때마침 한강 이남의 백제가 낙랑토성 규모 이상의 거대한 성을 만들었으니, 이는 동시대 삼국 수도인 고구려 국내성, 신라 월성과 비교해도 훨씬 더 큰 규모였다
p12 게이타이 덴노 이전까지는 실존 인물과 가공 인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정말 조심스럽게 일본서기를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5 백제 왕이 낙랑 태수가 되었으니 낙랑과 대방의 지배권을 백제가 가져왔음을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다. 또한 이 일은 나름 큰 의미가 있으니 이 뒤로는 중국의 군현이 아닌 한반도 국가가 직접 중국, 한반도, 일본 간의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후로도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이런 방침은 쭉 이어졌다
p21 고구려는 처음 시작할 때 졸본부여라 칭했고 백제는 나중에 남부여라 자신을 칭했으니, 이처럼 부여를 뿌리로 둔 두 국가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국가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p22 청자는 기본적으로 차를 마시기 위한 그릇으로 개발된 것으로 완벽하게 청자의 미감을 즐기려면 당연히 차를 마시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어봐야 완성되는 감각이다. 한때 옥으로 차를 마시던 중국인들이 옥과 비슷한 푸른색을 지닌 그릇에 집착한 결과가 바로 청자이기 때문이다
p29 흥미로운 점은 고분마다 1호부터 10호까지 숫자가 매겨져 있는데, 입구 왼쪽으로 4기는 각기 1호, 2호, 3호, 6호이고 오른쪽 4기는 각기 7호, 8호, 9호, 10호이다. 즉 방이동 고분 안에는 4,5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본래 있었던 4, 5호 고분 위치에는 현재 빌라가 들어서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p31 목표한 대로 장수왕은 개로왕을 비롯하여 백제 왕족 대부분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잡아 포로로 삼아서 고구려로 돌아간다. 8000명의 상당수가 백제 고위층이라 볼 때 백제는 지배층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p33 그리고 1400여 년이 지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일본은 이곳을 세밀히 조사하여 고분 분포도를 도면으로 남겼다. 그 결과 당시만 해도 총 290기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왕의 능과 그 외 왕족 및 귀족의 무덤 등이 위계에 따라 구분된 채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불과 8기만 남긴 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p43 이곳에는 고분 내부를 비어 있는 상태로 보여주는 곳 외에도 백제 시대 닫혔던 무령왕릉 문을 처음으로 열었을 때 내부에 유물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실제 크기 형태로 모형을 만들어 전시해두고 있다
p52 2018년 1월, 당간지주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곳에 신식 한옥을 만들려고 땅을 팠는데, 이곳에서 대통이라 새겨져 있는 기와 등 2만 여 유물이 쏟아져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목탑 내 중심 기둥을 가리기 위해 장식되었던 나한상 조각의 일부가 출토되기도 하였으니, 즉 과거에 이곳에는 목탑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크다 하겠다. 더해서 일부 기와에는 붉은 색의 단청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p55 현재 공산성은 대부분이 돌로 만들어진 성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서울의 풍납토성처럼 토성이었다. 조선 시대에 돌로 성을 개축하면서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p60 전장을 책임지는 태자를 지원하기 위해 성왕이 태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이동하다가 그만 매복된 신라군에게 공격당하면서 사로잡혀 목이 베이고 만다. 성왕은 이렇게 위대한 백제의 꿈을 마저 완성시키지 못하고 서거하고 말았다.
p66 정림사지는 유명한 곳이기는 하나 여전히 비밀이 많은 백제 옛 사찰 터로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다만 부여의 딱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다가,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어 백제 시대에 중요한 절로 자리매김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p70 평양에 낙랑이 있던 시절부터 낙랑-가야-일본으로 연결된 루트가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보면 유독 가야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일본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철을 생산하지 못하던 일본에게 가야는 중요한 철 공급처이기도 했다.
p74 부여로 수도를 옮긴 뒤로부터의 왕들이 묻힌 곳인데, 유물은 이미 도굴된 상황이라 거의 남은 것은 없지만 고분군과 부여 외곽 성벽이었던 나성,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던 능산리 절터가 함께 자리잡은 장소다
p77 김제평야 하니까 330년 백제가 만들었다는 벽골제가 생각나는 걸. 기로강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와 제방으로 그 위치가 현재의 김제평야이다. 지금도 벽골제는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벽골제민속유물전시관이라 하여 박물과도 있으니 혹시 관심 있는 분은 가보도록 하자
p82 석탑의 조상 중 조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 이후 돌로 탑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p85 정리하면 1.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하여 국가를 운영했고 2. 639년 제석사라는 절에 번개가 쳐서 화재로 타서 사라졌으며 3. 초석 안에 보관해두었던 사리도 사라져 있었다. 4. 이에 왕이 승려를 불러 참회하고 다시 사리병을 열어보니 사리 6개가 나타났고, 5. 절을 지어 이를 봉안했다라는 내용이다
p87 여러 자료가 더 쌓이면서 최근에는 백제 탑으로 왕궁리 석탑을 보는 이가 크게 늘어났다. 물론 통일신라~고려 초 주장도 약해졌지만 여전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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