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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2_독후감

[2022-100] 시민의 한국사1

by 반란을_꿈꾸며 2022. 12. 21.

 : 시민의 한국사1

 : 한국역사연구회

 : 돌배게

 : 2022/11/08 - 2022/12/18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국사 통사를 읽었다.

내용도 꼼꼼하고 최근 발견된 내용들도 많이 업데이트됐다.

새롭게 추가된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려니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시험용 서적이 아니다보니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배경도 같이 설명해준다.

한번 읽어서 이해될 수는 없을 것 같고 앞으로 4-5회정도 더 읽어서 머릿속에 정리해야할 것 같다.

2권도 기대된다. 

 

 

p34 후기 구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쓰임새에 맞춰 찍개, 주먹도끼, 긁개, 자르개 등으로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썼다. 돌날의 아랫부분을 손질한 슴베도 만들었다. 이것을 나무자루에 꿰어 창이나 작살로 쓰거나, 더 작게 만들어서 화살촉으로 사용했다. 슴베찌르개는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p39 한반도와 그 주변의 신석기문화는 대략 기원전 8,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p42 신석기인은 이전처럼 막집도 지었지만, 조금 발전된 움집을 짓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p53 청동기가 보급된 이후에도 농기구는 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는데, 반달돌칼, 돌보습, 나무 쟁기 등이 대표적이다

p56 최근에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민무늬토기의 등장 시점을 근거 삼아 기원전 15세기로 보기도 한다. 다만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비파형동검이나 청동거울은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등장했고, 한반도 지역에 청동기 문화가 널리 보급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다.

p95 문헌과 금석문에 보이는 동부여라는 나라가 부여와 별개로 존재했는지, 위치가 어디였는지 등은 명확히 알 수 없다

p105 동해안의 옥저와 도예는 예족이라는 동일한 종족이다

p107 집단끼리 서로 침범할 경우 노비나 소,말로 배상하도록 했는데 이를 책화라고 했다. 특별히 음력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p115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을 도읍으로 삼고 중원 진출을 도모했는데, 342년 중원 공략에 앞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는 모용황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해 도성인 국내성이 함락됐다. 전연군은 고국원왕의 부왕인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왕모와 왕비 등 주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철군했다

p117 고국원왕은 미천왕대에 점령한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며 남진정책을 추진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때 중국계 망명인을 활용했다. 이는 안악 3호분2의 무덤주인인 동수가 중국계 망명인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p123 백제국은 대외적으로 목지국을 압도하며 점차 마한의 중심 국가로 올라섰다

p133 마립간 시기부터 경주에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널에 시신을 넣고 그 위에 껴묻거리를 넣은 덧널을 덧세운 다음, 그 주위에 돌을 쌓고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p181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즉위했다. 진평왕은 신라사에서 유례없이 긴 재위 기간을 누리면서 정치적 안정과 함께 제도정비를 이뤘다

p215 고구려는 372년에 태학을 두었다. 여기서 박사들이 학생들에게 유학 경전 등을 강의했는데,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와 별도로 경당이 있었는데, 여기서 청년들이 활쏘기를 익히고 중국 고전을 공부했다

p221 이른 시기 금석문은 한자를 우리말 어순으로 작성한 것이 많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의 비문들에는 순한문투의 문장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신라사회에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심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p253 수의 고구려 원정이 임박함에 따라 각국의 외교적 대응이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다

p257 당시 고구려는 왕권이 매우 약화된 귀족연립체체상태였다. 백제도 무왕대에 왕권이 많이 강화됐지만, 여전히 대성8족 등 귀족 세력의 권한이 막강했다. 신라도 선덕여왕의 측근세력과 반대파 진골 귀족의 대립이 깊어지고 있었다

p265 백제도 당과 관계를 소홀히 하면서 신라를 계속 공격하던 중에 나당 연합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삼국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넘어서 동북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p271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663년 6월 부여풍이 복신을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 지휘를 총괄하던 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은 크게 동요했다

p275 이 무렵인 670년 4월 티벳 고원의 토번이 당을 공격해 도성 일대를 위협했다

p279 신라의 당군 축출은 당의 동방정책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돌권의 부흥과 발해 건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 변동의 단초를 열었던 것이다.

p283 즉위한 지 한 달을 갓 넘긴 681년 8월에 왕의 장인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모반의 주동자는 물론 가담한 모든 사람들 처형했다

p319 국왕권을 한층 강화해가던 682년에 예부 산하에 국학을 설치했다

p329 황룡사 종과 725년에 만든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은 귀족 가문의 공방에 소속된 장인이 만들었다. 큰 사찰도 자체 공방을 운영하고 승려가 장인을 겸했다.

p335 가부장제를 바탕에 둔 사회이지만 여성의 재혼이나 사회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는 홀로 된 뒤에 원효와 재혼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나온 삼모부인은 거대한 황룡사 종을 주조하는 사업에 대시주자로 참여했다

p345 문무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며 크게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의상은 승려는 무소유를 지향하며 불교의 가르침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p351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부른 우리말 노래로 진성왕 때에 각간 위홍과 승려 대구화상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했다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만이 알려져 있다

p357 신라 범종은 걸개 옆에 종의 내부와 통하는 음관을 설치해 깊은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는데, 다른 나라 종들에는 보이지 않는 한국 종의 특징이다

p365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원정을 명령했으나 그는 전쟁의 상대가 당까지 확대될 것을 우려하며 반대하다가 726년 당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당시 발해 지배층은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반당파와 친당파로 분열되어 있다

p379 내분기에 이탈한 말갈 부족을 9세기 초에 선왕이 다시 정복한 이후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완비됐다. 발행의 영역은 남쪽으로 신라와 접했고, 서쪽으로 거란과 이어지며 동쪽으로 연해주까지 미쳤고, 북쪽으로 동류 송화강 하류를 경계로 삼았다

p387 조각으로는 정혜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돌사자와 흥륭사 석등이 대표적이다. 돌사자는 눈을 무릎뜨고 머리를 치켜들고 있으며 혀를 만 채 입을 벌리고 있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강한 힘을 표현한 조각 수법이 돋보인다. 상경성 2호 절터에 위치한 석등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기둥돌 아래와 위에 새겨진 연꽃 무늬도 부조가 강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

p349 그에 따라 화폐 제조를 담당하는 주전도감을 설치해 해동통보,삼한통보 등의 동전과 활구라고도 불린 은병을 주조,발행했다

p357 정치가 경색된 가운데 측근 세력의 문,무신 사이에 권력 다툼이 생겼다. 결국 1170년, 견룡군 장교들이 중심이 된 무신들은 보현원에서 왕이 연회를 벌이고 있는 틈을 타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p367 고려는 최우가 집권하던 1231년 처음 몽골의 침공이 잇은 후부터 1259년 강화가 논의될 때가지 장기간 맞서 싸웠다

p403 1269년 고려 세자 왕심(충렬왕)은 원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원에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황실의 딸과 통혼할 것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p407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대에 지어진 고려가요 혹은 향악곡으로 알려져 있다. 남녀관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를 남녀상열지사라 하기도 했다

p447 노비는 호적에 등재됐지만, 재산으로 취급해 상속되거나 매매됐다. 국가에 역을 부담할 의무가 없는 대신 권리가 제한돼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과 토지 등 재산뿐 아니라 노비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했다. 부유한 노비는 주인에게 재물을 주고 양인이 될 수도 있었다

p452 이혼과 재혼을 대하는 당시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남녀 모두 의무적으로 정조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호 신의의 원칙에 입각한 개념에 가까웠다. 이규보가 한 남성의 묘지명을 지어주면서 “혼인한 이후에 다른 여성과 관계한 일이 없다”는 망자의 말을 기록한 것을 보면, 정조를 지키는 경우가 얼마나 흔치 않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p460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쪽을 따른다거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어기는 실수를 하라는 역대 국왕의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p464 화엄종은 교학불교를 대표하며 불교 교단에서 그 위상을 회복했다. 왕실에서는 화엄종에 관심을 표하며 원찰이나 진전사원을 화엄종 사찰로 지정했고, 왕자들을 화엄종에 출가시키자 문벌 자제가 화엄종으로 출가하기도 했다

p476 연등회와 팔관회에서의 연회는 왕과 신하 간의 위계질서를 확인하고, 서로의 우호를 다지는 행사인 동시에 관민이 어우러져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격도 있었다. 이는 훈요10조에서 당부한 것처럼 군주와 신민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던 것이다

p477 첫 번째는 1011년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시작됐다

p495 천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사천대와 태사국은 고려 초기에 설치되어 일식이나 월식 등을 관측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

p500 초기에는 주로 대형 천불이 많이 제작됐으며, 대형석불은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불상 의외의 조각으로는 태조 왕건의 동상이 유명하다

p517 정도전은 국가 운영에서 국왕보다는 신료를 중심에 두는 방안을 모색했다. 주자성리학이 제시한 정치사상을 좇아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추구했던 것이다

p531 명은 다른 나라가 조공을 바칠 때는 입국 확인서인 감합을 요구했지만 조선의 경우 국왕의 표문만으로 허락할 정도로 조선을 인정했다

p577 유학에서는 정치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역사 기록을 중시했는데, 조선은 이러한 이념에 따라 사관제도를 정비하고 사관의 위상을 강화했다.

p596 사림은 피해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이나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 기반을 확산하는 등 계속 성장했던 것이다. 명종 말 선조 초에 이르면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정치를 주도했다

p606 이는 스스로 작용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존재와 도덕을 일괄해 이기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때문에 이황은 이기이원론자, 이이는 이기일원론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p607 기대승과 벌였던 사단칠정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이황은 이를 중시했을 뿐 아니라 도덕 원칙과 명분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p611 대학이 성인의 수신부터 치국평천하까지 이르는 추상적 지침을 담고 있다면, 소학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도덕적 행실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다.

p615 조선에서 왜인에게 주던 혜택과 무역량을 줄이자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이 폭동을 일으키거나(삼포왜란), 일본 국내의 혼란으로 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p630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하면 극히 짧은 기간에 마무리됐음에도 오랑캐로 간주하던 여진에게 패배하고 조공국이 됐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파장이 더욱 컸다. 아울러 항복의 책임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이 잠재됐다

p644 향약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사회적 동요를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양반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향촌사회에서 양반층과 상천민 사이의 신분차별도 한층 공고화됐다.

p651 조선 후기 5군영은 일관된 계획을 갖고 설치됐다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른 것이었기에 각 편제나 조직, 그리고 운영 방법 등이 제각각이었다

p655 정조가 추진한 탕평은 충과 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되, 붕당을 구별하지 않고 오로지 충성스러운 자만을 등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충은 와에게 중성하는 자만을 등용한다는 의미다

p670 대동법의 수취율은 시행 초에는 도마다 차이를 보였지만,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점차 12두로 고정됐다

p675 19세기 초 1,000만 석에 이르는 환곡은 더 이상 농민들에게 재분배의 혜택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과세 부담으로 작용해 농민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p687 조선시대 한양 주민 중에서 핵심 집단은 관료와 그 가족이었다. 대다수의 관료는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관료가 되면 상경했다가 은퇴하면 낙향했지만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며 한양에 세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대대로 한양과 그 인근에 살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족층을 경화사족, 경화세족이라 부른다

p694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노비면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는 일천측천의 가혹한 노비세전법은 1669년(현종 10) 양인의 증대 방침에 따라 종모법으로 전환됐다. 혼란을 거듭하던 종모법은 1731년(영조 7)에 확정돼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신분 해방을 가져다줬다.

p701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에 고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홍경래와 같은 영웅이 나타나 민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전국 각지로 퍼져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