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작가 : 최정동
번역 :
출판사 : 한길사
읽은날 : 2020/12/02 - 2020/12/07
바흐가 태어난 곳에서부터 죽을때까지 바흐의 삶의 흔적을 따라 여행한 바흐순례기다.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지?
바흐가 슬픈 음악만 만든 것도 아니고, 그의 삶이 슬픈 것도 아닌데...
바흐의 평전도 읽어보고, 바흐의 음악에 대한 책들도 읽어봤지만, 바흐가 살았던 동네에 대한 책은 처음 읽어본다.
그래서일까? 무척 집중해서 읽었고 몰두해서 읽었다.
그리고 슬펐다.
그가 태어난 아이저나흐에서 마지막 라이프치히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의 흔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태어난 장소인 아이저나흐는 바흐보다는 루터를 발견하는 곳이고, 어떤 곳은 주차장에 팻말로 여기가 바흐가 살았던 곳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일부러 알고 찾아가야 간신히 팻말을 볼 수 있는 동네도 있다.
최고의 칸토르마스터를 구할 수 없어 중간급을 구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바흐.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그리고 신의 이름을 위해 성실하게 하루하루 작곡을 하고 연주단과 성가대를 연습시키며 살던 바흐.
자기가 죽기도 전에 후임이 정해지며 모욕을 당했던 바흐.
이래서 제목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인가?
그런 그의 발자취를 찾는건 쉽지 않지만 해볼만한 여행이다.
대충보니 한달정도면 순례가 가능할 것 같다. 실제 바흐가 다녔던 길을 걷는 것을 포함하면 2개월쯤 걸릴것 같다.
꼭 한번 해봐야겠다. 버킷리스트가 하나 늘었다.
P14 초상화에서 읽은 바흐의 인상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집불통인데다, 지기 싫어하고, 다혈질이었습니다
P28 그 가운데 유서 깊은 성 게오르크 교회가 우뚝 솟아 있다. 이 도시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다
P39 학계에서는 192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 현재의 루터슈트라세 35번지를 제바스티안의 생가 터로 확인했다
P43 바흐하우스의 전시 내용은 충실하다. 구관의 오래된 방들엔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바흐의 삶을 유물과 그림, 사진으로 알차게 정리해놓았다
P54 1207년 독일의 내로라하는 음유시인들이 모여 노래경연대회를 열었는데 실제로 그것은 노래전쟁이라 불렀다. 수백 년 뒤 성을 방문한 바그너는 옛 노래자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페라 탄호이저를 작곡했다
P66 그는 큰형이 공부하라고 내키는 대로 내주는 어떠한 곡도 금방 거뜬히 정복했던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보다 배우는 사람의 열의가 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P68 제바스티안은 오어드루프에서 1등급 반에 진학했지만 마치지는 못했다. 갑자기 오어드루프를 떠나 멀리 북쪽의 뤼네부르크로 떠났기 때문이다
P70 제바스티안의 형 크리스토프가 살던 집이다. 할머니가 보기에 이 동양인은 바흐에 관심이 있어 오어드루프까지 왔는데 혹시 중요한 곳을 빠트릴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볼 데도 없었는데 고마운 일이다
P77 가발은 쓴 근엄한 모습에 익숙한 우리는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어린 바흐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비범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프라노 음성을 가진 소년이었다
P82 뤼네부르크는 북해의 항구도시 함부르크권에 속한 도시다. 중부 독일 튀링겐에서는 제법 멀게 느껴진다
P88 뤼네부르크는 북독일의 로텐부르크라 불리기도 한다. 로텐부르크는 남부 바이에른 주의 중세도시로 독일의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P92 기독교 사회인 유럽에서 물고기는 예수의 육신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유럽인은 사순절 등 1년에 100일이 넘는 금식 기간에 육류 대신 소금에 절인 청어를 먹었다. 중세에 청어는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다
P93 소금 수요가 줄면서 뤼네부르크는 급속히 쇠퇴했다. 그 후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다. 오늘날 이 도시가 16세기 모습 그대로 박제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P129 빨간 시청 앞, 텅 빈 광장에 그가 앉아 있다. 1705년 어느 여름 밤, 칼을 빼들고 활극을 벌였던 스무 살의 바흐 말이다. 청년은 굽이 높은 가죽 구두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 몸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있다. 상의는 헐렁하다. 가슴이 깊이 파이고 소매가 풍성한 셔츠다. 외투는 벗어서 깔고 앉았다. 자세는 도발적이다. 비스듬히 눕듯 몸을 젖히고 있다. 양다리는 약간 벌린 채 한껏 뻗었다. 오른손은 건반을 상상으로 짚듯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앞으로 내민다
P129 발아래에 J.S. BACH,뒤에 ARNSTADT 1703~1707을 잘 보이지도 않게 새겼다
P132 바흐는 원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른슈타트에 머문 시절은 20세 전후의 청년기였다. 질서를 따르자니 답답하고 성격대로 하자니 세상이 그냥 두지를 않았다
P141 아른슈타트에는 바흐가 잠시나마 살던 집들이 남아 있다. 살아 있을 때 그리 유명하지 않았고 죽어서도 곧 잊혀졌기 때문에 그가 살던 곳들은 거의 보존되지 않았다. 아이제나흐의 생가는 흔적조차 없고 오어드루프에 있던 형의 집도 위치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정은 바이마르와 쾨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른슈타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 귀하게 대접받는다
P149 바흐는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일기는 아예 쓰지 않았다. 편지는 라이프치히 시절 뤼네부르크 유학 동창생 에르트만에서 보낸 것 정도가 자료 가치가 있을 뿐이다
P169 인생행로에서 우연히 귀한 것을 만나면 그 순간에 충분히 누릴 일이다. 나중은 없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다
P175 바흐는 남아도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공부에 몰두해 오르간 연주와 작곡 기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실제로 아른슈타트에 머문 4년은 첫 번째 창작의 열매를 거둔 시기였다
P177 바흐는 순순히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악동처럼 굴었다. 주의를 받고 난 직후의 예배에서 그는 전주곡을 극단적으로 짧게 연주했다. 몇 소절 치고는 끝내버린 것이다. 바흐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길다고요? 그럼 짧게 해드리죠. 그거 전혀 어렵지 않아요'
P207 바흐는 뮐하우젠을 징검다리 삼아 바이마르로 갔지만 이 도시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다. 갑자기 떠난 뒤에도 그가 제안한 오르간 재건을 책임감을 가지고 마무리까지 감독했다.
P213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죽으면 현지에 유해를 묻고 본국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유물론적 사상 때문이라고 한다. 625때 전사한 마오쩌둥의 아들도 북한에 묻혀있다
P225 알마는 말러에게서 재능을 끌어내기 위해 거의 학대를 하다시피 앴다고 한다. 다른 사내들에게도 그랬는지 모른다. 네 남자는 음악, 미술, 건축, 문학의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들은 헤어져서도, 죽을때까지 알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P228 물론 그 집은 현재 없다. 다른 도시들처럼 바흐의 체취가 스민 공간은 옛날에 사라지고 없다. 바이마르 시는 그곳에 안내판을 붙여놓았는데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P232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바흐 오르간 작품들은 바이마르, 즉 힘멜부르크의 높다란 가펠레에 있던 오르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P294 이시기의 칸타타들은 앙상블 규모가 작아 실내악적이면서도 색채감이 뛰어나다. 그것은 연주장소 덕분이다. 힘멜부르크라는 작고 아름다운 공간을 울리는 음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기자기하고 깊은 호소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P249 전교수에게는 당황스러웠을지 몰라도 학구적인 이 나라 사람들은 고성의 한 공간이 괴테를 공부하는 학자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P258 바흐는 뭔가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참다못한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죄목은 '너무 귀찮게 자신의 면직을 요구한 것'이었다
P262 차이콥스키의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을 들으며 나이 차이도 많고 개성 강한 사람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끝도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P273 국민 대다수는 정부 정책을 전폭 지지한다. 전기료를 더 내더라도 원자력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P282 쾨텐 궁정에서는 밤낮으로 음악회가 열렸다. 연주곡은 크고 작은 앙상블을 위한 기악음악, 특히 콘체르트와 소나타가 많이 연주되었을 것이다. 바흐의 기악곡 중 최고봉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프랑스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P286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곡이 몇 개 있다. 비탈리의 샤콘느 g단조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 같은 곡들이다
P295 우리가 사랑하는 대표적인 건반악기, 현악기 명곡들이 쾨텐에서 탄생했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바흐가 다른 곳에서는 꿈꾸기 힘들었던 이상적인 환경을 이곳에서 누렸기 때문이다
P299 LP라는 것은 한 번 들을 때마다 수명이 줄어든다. 다이아몬드 바늘이 비닐 소리 골을 마찰해야 하는 물리적 특성 탓이다. 잘만 관리하면 영원히 소리가 변하지 않는 CD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P300 만년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전곡 녹음을 한 로스트로포비치는 여섯 모음곡의 성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1번은 가벼운 음색이고, 2번은 슬프고 강렬하며, 3번은 찬란하고, 4번은 꽉 차고 불투명한 느낌을 풍기며 웅장하죠. 5번은 매우 어두운 음색이며, 6번은 밝은 음색인데 햇빛처럼 눈부십니다"
P301 카잘스의 여섯 곡 해석은 로스트로포비치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1번 낙관적, 2번 비극적, 3번 영웅적, 4번 장엄, 5번 격정적, 6번 목가적이라고 했다
P303 바흐는 라이프치히로 떠나고 나서도 이 도시를 이따금 방문했다. 자신을 아껴준 전 주인의 애경사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방문해 정성들여 만든 음악을 연주했다.
P309 라이프치히 시절 바흐는 네 차례에 걸쳐 클라비어 위붕시리즈를 발표했다. 1부 여섯 개의 파르티타에 이어 이탈리아 협주곡, 프랑스풍 서곡이 들어 있는 2부, 바흐가 작곡한 가장 중요한 오르간 작품들로 구성된 3부, 그리고 4부가 그 유명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이다
P312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수면제가 아니라 진통제였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르다고 본다. 어떤 연주든 골트베르크변주곡이 있다면 들어보라. 잠이 오기는커녕 오던 잠도 화들짝 깨는 연주도 많다. 대신 백작이 말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P319 라이프치히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수난곡인 요한수난곡은 장장 25년에 걸쳐 성장과 진화를 거듭했다
P328 토마스칸토르는 이 특별한 합창단과 함께 라이프치히라는 자부심 강한 도시의 음악을 담당해야 했다
P331 바흐는 토마스칸토르로 열심히 일하고 많은 성과를 냈지만 기대했던 만큼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P333 무슨 생각을 했는지 토마스 학교도 같이 밀어버린 것이다. 18세기도, 19세기도 아닌 20세기에 말이다. 20세기는 사진의 시대라 많은 사진자료가 남아있다. 당당한 겉모습과 바흐가 작곡을 하던 방, 토마스 학교 교실과 기숙사, 건물 내부 계단까지 바흐가 일했던 현장 구석구석을 깨끗한 사진으로 볼 수 있다
P334 바흐는 깊은 밤 식구들이 모두 잠들면 브랜디 한 병을 들고 이 방에 들어와 작곡에 몰두했다
P337 그것은 멘델스존이 세운 바흐 기념주다. 그는 존경하는 바흐를 위해 이 조형물을 세울 뒤 기념사진을 찍듯 그림을 그렸다
P339 동상은 원래 1892년에 제작되었는데 나치 시절에 파괴되었다가 2008년에 원형대로 다시 만들어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수난을 당한 것은 멘델스존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P360 멀리서 보면 오랜 연륜을 그대로 간직한 것 같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상처투성이다. 공습때 검게 그을리고 무너진 돌을 다시 쌓아올리고 사라진 부분은 새 돌로 갈아 끼웠다
P366 되살아난 성모교회에 앉아 있으니 가슴이 벅차오르지만, 현재의 나는 두 거대한 비극 사이에 운 좋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P371 두 아들은 모두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지만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이 도움이 된 것은 틀림없다. 바흐는 헬리콥터 아버지였다
P376 독일 북부 호엘촐레른 가문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선제후의 지위를 대대로 이어오다가 1701년을 기점으로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P377 참다못한 프리드리히는 영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친구와 작전을 짰으나 시종에게 들켜 실패하고 말았다. 왕은 탈영한 두 놈을 모두 죽여버리라고 노발대발했으나 아들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친구만 목이 잘렸고 프리드리히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P384 왕은 바흐에게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했다. 토마스칸토르는 늙었으나 당대의 건반악기 연주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P386 바흐는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서둘러 곡을 완성하고 은악의 헌정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왕의 면전에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결과는 대규모로 확장된 작품이었다.
P396 브란덴부르크 문은 평화의 상징으로 지어졌으나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의 어떤 문보다도 자주 개선 군대를 통과시켰다. 전쟁에 이긴 프로이센과 독일의 군대는 이 문을 지나 수도로 입성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유럽을 휩쓸던 나폴레옹은 1806년 프로이센을 꺾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해 베를린에 입성했다. 문 위의 빅토리아 여신은 그를 따라 파리로 가야 했다. 그러나 10년도 채 안 돼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를 점령해 그녀를 되찾아왔다
P399 그를 비롯한 도시의 원로들은 고집불통에다 드레스덴 궁정의 위세에 기대 안하무인으로 구는 바흐가 지겨웠을 것이다
P403 바흐의 삶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다. 여행 전 저 사람의 책을 구입해서 봤다. 바흐 여행 가이드인데 텍스트가 독일어라 내용을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바흐 순례를 하려면 어디에 가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P406 바흐가 위대한 것은 속도전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P412 바흐는 평생 건강하게 살았다. 신생아의 절반이 겨우 살아남던 시대에 큰 병 앓지 않고 강건한 몸을 유지했다. 와인과 맥주, 담배를 즐기고 두 여인을 정열적으로 사랑했다
P416 바흐의 발자국은 흐릿하거나 군데군데 지워져 있었다. 그는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
요한 세바스찬 바흐1,2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한양대학교 출판부)
-
바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음악세계)
-
바흐(한길사)
-
내 남편 바흐(우물이 있는 집)
-
괴테의 도시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문학과 지성사)
-
빈에서는 인생이 아르다워진다(김영사)
-
Bachstatten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독일사
'독후감 > 2020_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83] 푸름아빠 거울육아 (0) | 2020.12.16 |
---|---|
[2020-82] 삶이 축제가 된다면 (0) | 2020.12.14 |
[2020-80]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0) | 2020.12.02 |
[2020-79] 서른살에 스페인 (0) | 2020.12.02 |
[2020-78] 리더라면 정조처럼 (0) | 2020.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