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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2022_독후감

[2022-79]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by 반란을_꿈꾸며 2022. 9. 20.

 :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 황윤

 : 책읽는 고양이

 : 2022/09/11 - 2022/09/16

 

예전에 어느 책 머릿말에서 본 글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때 책을 쓴다.

국립중앙 박물관을 여러번 방문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박물관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금과 동, 불교미술을 엮어 박물관 구경하기라니.. 참신했다.

시대순으로 죽 훑어보거나, 아니면 시간을 길게 들여서 시대별 유물을 보는 게 전부였는데, 이런게 테마를 잡아서 본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알아야 테마를 잡아서 보는게 가능하다.

덕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유물을 보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이런 맛에 책을 읽는다. 또 하나 배웠다. 

 

 

p20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과거의 불교 문화재 및 일본 옛 유물을 실패한 구시대 것으로 인식하여, 오히려 자국민인 일본인에 의해 크게 훼손당하는 일이 무척 잦았다.

p30 무엇보다 반가사유상은 단순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일반 불상과 달리 좌우 균형이 맞지 않고 포즈도 무척 복잡해서 주조과정의 난이도가 훨씬 높은 편이었다.

p44 사실 이 청동기는 제사를 주관하던 마을의 지배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몸에 걸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p69 이런 이집트보다 먼저 금제품을 사용한 집단이 있었으니, 불가리아 동부 흑해에 인접한 항구 도시 바르나에서 1972년 거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까마득한 과거의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p77 여기까지 정보를 종합해보면 무덤의 주인공은 북방, 그러니까 부여에서 이주한 지 얼마 안 된 세력이자 낙랑과도 깊은 관계를 지닌 인물일 수도 있겠다.

p82 자세히 보니 기린인지 천마나 사슴인지 모르겠지만, 뿔이 달린 기묘한 동물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붉은 구슬 같은 보석이 6개 박혀있다. 무엇보다 이와 유사한 유물이 몽골, 즉 과거 흉노 지역에서 출토된 적이 있기에 흉노와 연결된 유물임을 알 수 있다.

p88 낙랑 전시실의 하이라이트다. ㄷ자 형태의 낙랑 전시실에 전시 중인 유물 45% 정도가 한 인물의 무덤 부장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p97 지금은 중국으로 편입되어 그렇지 그 옛날에는 황하 문명으로 대표되는 중원 외에도 수많은 독자적 문명이 주변에 존재했던 것이다.

p104 지금까지 보았듯이 황금은 기원전 3000년경 유라시아 대륙 서쪽부터 크게 흥행하다 드디어 동아시아까지 본격적인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했다.

p107 고구려는 오랜 집념과 노력끝에 드디어 미천왕 때인 313년 낙랑을 축출하여 한반도 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미천왕은 위대한 업적과 이름을 한민족 역사에 단단히 새긴 것이다.

p110 낙랑인은 백제로도 이주했다. 백제 역사서를 썼다는 고흥, 백제에 의해 일본으로 파견되어 논어, 천자문을 알려주었다는 왕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p111고대 한반도에서 낙랑은 단순히 한나라 군현이라는 의미를 넘어 중국과 연결되는 문화적 다리 이미지로서 존속했다.

p132 고구려의 예시를 보듯 아무리 굴욕적인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제대로 갚아준다면 과거의 실패는 위대한 역사를 위한 일부로서 기억될 뿐이다.

p136 신라측 사신이 광개토대왕 제사에 참가한 김에 제사 그릇 중 일부를 받아왔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예상을 하냐면 이 그릇이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임에도 신라 경주 고분에서 부장품으로 출토되었기 대문이다.

p152 학계에서는 황남 대총의 주인을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중 한 명으로 보는 중. 즉, 아무리 늦어도 황남 대총이 만들어진 시기를 5세기 중반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p174 당시 신라 왕은 고구려의 의도에 따라 언제든 교체될 정도의 존재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장수왕은 젊은 고구려 왕의 신라에 대한 통제력을 여실히 보여주고자 했던 것.

p194 식리총의 금동신발을 다시 살펴보니, 이게 웬걸? 제작 방식이 신라 형식이 아니라 백제 형식으로 만들어진 신반이었다. 즉, 백제 신발이 신라에 와서 부장품으로 묻혔던 것

p211 백제에게 중요도가 큰 세력에게는 용과 봉황을, 중요도가 조금 떨어지는 세력에게는 일반 무늬로 구별했던 것.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 금동관이 바다 건너 일본에도 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p225 일본이 강한 시절에는 한반도 유물을 가져갔듯이 반대로 한반도가 강한 시절에는 일본 유물이 한반도로 유출되었구나라는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 즉, 이러한 작품 수집이 미래 세대의 근현대 역사 이해에 중요하다는 의미

p228 한반도의 고리자루 큰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의 칼이 있다. 둥근 고리 안으로는 용의 얼굴을 배치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육각형 틀 안에 봉황을 새긴 은판으로 장식했다.

p247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200년 뒤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왕이 인도 통일 왕국의 역량을 다해 널리 알리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춘다.

p252 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 신라는 527년에 각각 불교를 도입하면서 대승 불교는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종교로 우뚝 서게 된다. 이때 고구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다.

p254 삼국시대 불교 조각 이야기를 할 때 한반도에 영향을 준 인도, 중국 불교 조각을 직접 보면서 관찰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반대로 만일 일본 불교 조각이 있드면 한반도에서 영향을 받은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겠다.

p267 학계에서는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디자인을 534년까지 중국에 존속했던 북위의 불상 디자인과 비교하여 그 시기를 539년으로 파악한다. 즉, 고구려 안원왕 9년이라 하겠다

p276 사실 아소카왕과 진흥왕 사이에는 800년이라는 시간 격차가 존재하는 만큼, 이런 일화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찰을 만들고자 했던 신라왕의 의지를 멋지게 포장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p302 중요한 점은 석가모니 사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등장한 미륵은 석가모니의 법통을 잇는 새로운 부처이자 그의 세 번의 법회로 무려 282억 명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곧 미륵이 불교세계관에서는 메시아이자 구세주 같은 존재임을 뜻한다

p314 이 뒤로도 한인 엘리트들의 불교 견제는 여러 국가를 이어가며 지속되었지만 결국 불교는 중국 전역에서 황제부터 민중까지 믿는 대중적 종교가 되었으니, 이런 결과에는 이민족 출신의 황제가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하였다.

p326 간다라 미술에서는 미륵을 포함한 보살이 보여주는 여러 자세 중 하나에 불과했던 X자로 다리를 꼰 형식을 중국에서는 미륵 특유의 디자인으로 확립시켰다는 의미. 이에 X자로 꼬고 있는 중국 불상의 경우 보통 미륵으로 본다

p348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미륵은 용화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역시 미륵이 미래에 석가모니를 재현하는 인물임을 의미한다 하겠다

p355 조선 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을 평화 시기에 미리 여러 지역에 배분해둠으로써 임진왜란으로 수도를 포함한 전 국토가 참화를 경험했음에도 그 역사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인식하면 좋겠다.

p363 불경에 따르면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올 시기는 다름 아닌 진륜성왕이 통치하는 시점이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남조의 양 무제는 정치적 행동으로 살아있는 전륜성왕의 모습을 중국에서 선보였다.

p367 진흥왕은 태자인 동륜이 한반도 남부의 전륜성왕이 되고 손자 대에서는 새로운 석가모니가 탄생될 왕실 기반을 만든 후, 증손자 대에서는 드디어 석가모니가 신라 왕실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놀라운 스토리텔링을 구성했다.

p369 신라 왕은 미륵을 화랑의 우두머리로 삼았으니, 이처럼 본래 미래의 부처가 될 인물이 신라에선느 오히려 신라 왕을 도와 불국토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인물이 된 것이다.

p382 사유의 방에 두 반가사유상을 따로 전신하기 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서 한 점씩 교체 전시했는데, 이러한 전시 방식이 오히려 불교 세계관과 어울린다고 하겠다. 유물 보호 이외에도 오래전부터 반가사유상을 한씩 교체하며 공개하던 이유가 다 있었던 것

p393 상황이 이러하다면 7세기 중반쯤이 되면 한반도에서도 반가사유상 형태의 미륵 조각 역시 인기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사유의 방에서 만날 수 있는 반가사유상의 한계선을 보통 7세기 초중반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p399 조상기가 남겨진 불상을 통해 살펴보니 6세기 북위 시절에는 석가모니와 미륵이 주로 만들어졌으나, 7세기 당나라 시대로 오니 아미타부처와 관세음보살이 압도적으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