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난처한 미술이야기8
작가 : 양정무
출판사 : 사회평론
읽은기간 : 2024/10/18 -2024/10/26
무척 오랜만에 시리즈가 업데이트되었다.
쓰기가 어려웠을까? 아니면 바빴을까?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바로 주문해서 읽었다. 이번 시리즈는 바로크시대다.
보통 르네상스를 많이 보고, 그 다음으로는 인상주의를 보곤 했는데, 바로크의 화려한 모습을 보니 또 새롭다.
내가 알고있던 카라바조나 고야.. 이런 화가들이 다 바로크시대 화가들이었구나..
역시 미술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런 기초적인 내용도 잘 몰랐다.
바로크의 화려한 미술을 이탈리아, 북유럽, 스페인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는 르네상스에서 바로 인상주의로 가지 않고 바로크의 화려함도 느끼게 될 것 같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결국 아는만큼 보게되는 것 같다.
누군가 더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면 남은 내 인생에서 미술을 보는 눈도 높아지고 삶도 풍성해질 것 같다.. 좋다..
p7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함께 유럽 근대 미술의 양대 산맥입니다. 르네상스가 고전적 균형과 안정적 조화를 강조했다면 바로크는 탈고전적 화려함과 빠른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p21 그럴 수 있습니다. 너무 높은 톤으로 다가가면 도리어 상대방이 당황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크 미술이 그렇습니다. 좋게 보면 환상적이지만, 자칫하면 표현이 너무 과도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로크 미술을 절제를 모르는 과장된 미술이라고 비판하거나, 심지어 조롱하는 학자도 꽤 많습니다.
p58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고, 정확히 10년 뒤인 1527년에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로마의 약탈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1년 넘게 점령하며 도시를 잔인하게 약탈한 사건이죠. 고대부터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몇 차례 함락된 적이 있지만, 이때 입은 피해는 너무나 크고 광범위했습니다. 로마 주민 대부분이 죽거나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로마는 한동안 유령 도시나 다름없었습니다
p68 하루를 48시간처럼 바쁘게 살았던 성 카를로는 무너진 카톨릭의 위상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 카를로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p100 카라바조는 이 그림에서도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들의 표현에 집중합니다. 무엇보다 탁자 위의 카펫, 모자의 깃털, 옷의 질감 표현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고급스러워 인상적입니다. 더욱이 왼쪽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이런 디테일을 강하게 비추면서 그림자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명확하게 다가오죠
p120 지금까지의 미술에서 성인들은 높은 신분의 위인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종교화의 공식을 뒤집고 성경 속 인물을 평범하게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p125 카라바조가 성인을 빈민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 점은 성경의 맥락과 같죠. 예수 그리스도도 평생 가난하게 살며 백성들과 함께했으니까요. 카라바조의 그림을 좋아했던 후원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이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빈민들의 세계를 존중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p151 진격의 미술학교는 도메니키노, 귀도 레니, 구에르치노 같은 뛰어난 화가를 배출했습니다. 제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른보 볼로냐 화파가 탄생합니다. 결과적으로 카라치 형제의 아카데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양성소이자 미술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나아가 이탈리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학교였습니다.
p160 액자뿐 아니라 주변 건축 구조물과 장식까지 전부 그려 넣은 겁니다. 이렇게 건축 요소를 그림으로 구현해 관람자의 시선을 속이는 기법은 ‘과드라투라’라고 부릅니다.
p171 체라시 예배당은 1600년 교황의 재무관이었던 티베리오 체라시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체라시는 자신이 묻힐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당시 잘 나가던 두 화가, 안니발레와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주문합니다. 이렇게 예배당 중앙 제대 위에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그림이, 양옆에는 카라바조의 그림이 자리하게 됩니다.
p179 안니발레의 파르네세 갤러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스탄차와 함께 로마에서 반드시 봐야 할 3대 프레스코와로 손꼽힙니다. 그러나 천장화가 있는 팔라초 파르네세가 현재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막상 관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p186 화면 네 귀퉁이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진 포교 활동을 새겼습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서의 포교 활동을 카톨릭 복장을 한 여인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겁니다.
p189 당시에는 돔이 있어야 제대로 된 성당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을 지으려는데 돔을 지을 만큼의 건축비는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돔을 그려 넣은 거죠. 돔은 성당 옆 건물의 채광을 막으면서 주변의 민원을 받기도 했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단 가짜 돔을 그려 놓고 후에 제대로 된 진짜 돔을 지으려 했지만, 계획이 흐지부지되면서 지금까지 가짜 돔이 자리 잡은 겁니다.
p210 왼쪽의 시피오네 추기경은 멍한 표정입니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분명하지 않아요. 반면 오른쪽은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압권인데요. 무슨 이야기를 막 하려는 듯 입을 살짝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당시 사람들은 스피킹 라이크니스, 즉 말을 거는 듯하다고 평가하는데 곧 베르니니의 초상 조각의 특징입니다.
p213 베르니니는 두 개의 어마어마한 종탑을 대성당에 세우려고 했어요. 그러나 지반이 약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채 거대한 구조물을 짓다 보니 왼쪽 종탑에 균열이 가고 말았습니다. 대성당 전체가 모조리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1646년 종탑을 자체 철거했습니다.
p230 사실 바로크를 연극적 예술이라고 하는데, 이 수식어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이 성테레사의 황홀입니다. 베르니니는 예배당 중심에 있는 제대를 무대로 여기고 여기에 성 테레사가 영적 체험을 겪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p243 보로미니의 경우 타원형을 사용하면서도 실험을 통해 그 모양을 독창적인 형태로 변형시켜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베르니니는 순수한 타원형의 형태를 고수해 정적이며 담백한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p288 정물화의 발전 과정에서 아르트센이 그린 푸줏간은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다뤄집니다. 사물들이 화면 전면에 당당하게 배치되어 초기 정물화로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림 크기도 상당히 커서 높이 1.15미터, 폭 1.68미터입니다.
p308 무엇보다 이런 그림과 드링이 그려질 무렵 아트베르펜은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루벤스가 한군인을 직접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각종 기록을 통해 한국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었따고 짐작할 수 있죠
p326 이 결정은 네델란드의 경제 번영에 신의 한수가 됩니다. 유럽 곳곳에서 신아을 억압받던 이들이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네델란드 공화국으로 모여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네델란드로 모여든 종교적 난민의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렀습니다
p334 빌럼 1세는 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 군대에 맞서 싸워 북부7주를 독립의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날 그는 네델란드 국가에 나올 정도로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습니다. 빌럼 1세의 가문 오라너는 영어로 하면 오렌지입니다. 네델란드를 상징하는 오렌지색이 바로 오라너 가문에서 비롯한 겁니다.
p345 3차 영란전쟁에서 네델란드는 바다에서 영국, 육지에서는 프랑스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웁니다. 최종적으로 네델란드가 승리했지만 계속된 대규모 전쟁으로 네델란드의 국력은 점점 기울게 됩니다. 결국 18세기 들어 해상 권력을 영국에 넘기면서 네델란드의 황금기도 끝을 맞이합니다.
p358 그림의 대상이 일상적인 소재에서 점점 사치품으로 바뀝니다. 이처럼 16세기에는 소시민의 소박한 삶을 나타내는 정물화가 대부분이었다면 17세기에 들어서 정물화는 부유층의 고급스러운 삶을 우아하게 보여줍니다.
p365 만개한 해바라기 사이로 병들어 시든 꽃이 눈에 띕니다. 삶을 예찬하는 동시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네델란드 정물화의 전통이 반 고흐같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에까지 이어진 셈이죠. 반 고흐 역시 네델란드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찍부터 전통적인 네델란드 정물화의 특성을 알았을 겁니다.
p393 두 그림이 보여주는 직업 화가의 양면은 오늘날 미술계에서도 낯선 일이 아닙니다. 성공 혹은 실패에 따라 화가가 겪는 삶의 명암이 달라지니까요. 이 시기는 미술시장 성행부터 직업 화가의 숙명까지, 오늘날 미술계의 예고편인 셈입니다.
p405 학교풍경을 담은 얀 스테인은 한국에서 특이한 별명으로 불립니다. 바로 네델란드의 김홍도인데요. 얀 스테인이 그린 또 다른 마을 학교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 거에요
p429 루벤스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웅적인 신체로 잡아냈다면 렘브란트는 한 인간의 고결한 희생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그림은 크기도 꽤 차이가 납니다. 루벤스의 원래 그림은 높이 4.2미터, 폭 3.2미터로 웅장하지만, 렘브란트의 종교화는 개인의 묵상이나 교육자료로 그려 그리 크지 않아요. 높이 90센티미터, 폭 60센티미터로 아담하죠
p461 페르메이르는 거창한 사건이나 유명한 장소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잔잔히 담아냈습니다.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평화로운 일상은 네델란드의 군사적, 경제적 번영 덕분이었는데요.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지된 고요함은 조국의 번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p469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미술은 진리의 영속성을 추구하고, 바로크 미술은 진리의 순간성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두 그림 속에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대조적 세계관이 잘 배어있다고 할까요
p496 아래의 톨레도 제대화는 화려하지만 복잡해 보이고, 엘 에스코리알 제대화는 잘 정돈된 느낌입니다. 엘 에스코리알 제대화 중앙에는 로렌스 성인의 순교 장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펠레그리노 티발디라는 화가의 작품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티치아노의 작품이 걸릴 예정이었습니다.
p501 1556년 카를로스 1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 머물며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고, 엘 에스코리알까지 기획합니다. 따라서 스페인 미술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려면 펠리페 2세를 기준으로 삼는 게 맞을 겁니다.
p524 지상과 천상을 극적으로 표현하면서도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을 통해 그림의 중심까지 잘 잡은 덕분입니다. 당시 스페인이 요구했던 카톨릭 신비주의 가치관과 회화적 효과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낸 결과입니다.
p547 펠리페 3세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1605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출판입니다. 소설이 상징하는 부조리함과 엉뚱함이야말로 당시 스페인의 시대적 분위기였습니다.
p562 이 그림을 볼 때 채색도 눈여겨봐야 해요.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대상의 윤곽선을 정확히 그린 뒤 색을 칠합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붓으로 대충 물감을 뭉갠 듯 보입니다. 자유로우면서도 거친 붓놀림으로 형태를 대략적으로 그린 겁니다. 그런데 뒤로 두세 걸음 물러나서 보면 화려한 레이스 소매와 빛나는 금발이 눈에 들어옵니다. 춤추는 듯한 터치로 그림 곳곳에 정교하게 빛과 색을 녹인 선이 아닌 색채와 빛으로 형태를 만든 겁니다.
p574 다른 화가들은 몰라도 무리요만큼은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앞의 왼쪽 작품에서 보듯이 성모를 흰색과 파란색 옷으로 표현하고, 천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성모를 파체코의 가이드라인을 적절히 참고해 그렸죠.
p582 스페인 제대화 설계의 기본은 바닥에서부터 위까지 가득 채우는 겁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 울트라 바로크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왕들의 제대화의 폭은 13미터, 높이는 25미터입니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건축가 헤로니모 데 발바스가 설계해서 1718년~1737년 사이에 제작됩니다.
p591 포도주 석 잔을 내왔는데 지난번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많이 취하였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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